■ 현실 외면한 '소외층 배려 전형'이 비리 부메랑으로
이명박 정부가 야심 차게 내놓았던 핵심 교육 정책인 자율형사립고와 입학사정관제가 출발부터 누더기가 돼 버렸다. 사교육비 절감의 묘책으로 평가받았던 자율고와 입학사정관제는 부정 입학의 통로로 변질되고 말았다. 더구나 입학사정관제는 사교육비를 절감하기는커녕 새로운 사교육 시장만 만들어 냈고, 자율고의 사회적배려대상자 전형은 정작 어려운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의욕만 앞선 실적 채우기식 정책들이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내며 학교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해 사교육 없이 대학 가는 학교를 늘리겠다며 만들었던 자율고가 시작부터 입시 비리 사태로 휘청거리고 있다. 정원의 20%를 뽑는 사회적배려대상자 전형에서 부적합 학생들이 대거 교장추천서(중학교)를 받아 합격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상당수 학생의 입학이 취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은행 간부, 교사, 고수입을 올리는 학원 강사여서 소외 계층으로 보기 힘든 학생들도 교장추천서만 내면 자율고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정원 채우기에 급급한 자율고가 학생과 학부모를 상대로 부정 입학을 부추긴 정황도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문제가 불거진 23일에야 부랴부랴 건강보험료 납부액을 기준으로 학생을 선별한 뒤 추천철회서를 제출하도록 일선 학교에 지시했다. 시교육청 조사에 따르면 교장추천서를 받아 합격한 364명 중 부정 입학 관련 학생은 25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교 지원까지 마감된 터라 학부모들은 합격이 취소될 수 있다는 얘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자율고는 새 정부 들어 학교 만족도를 높이고 사교육비를 절감한다는 취지로 발표된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에 따라 만들어졌다. 설립 기준상 법인 전입금을 자립형사립고(6개)보다 낮은 3~5%로 하고 전국에 100개를 짓기로 했다. 자율고는 등록금이 일반 학교의 3배에 이르지만 교육 과정 편성이 자율적이어서 대학 입시에 유리하게 과목 선정을 할 수 있다. 자율고를 둘러싸고 국제중 특목고에 이은 제3의 귀족 학교라는 비판이 일자 정부는 정원의 80%는 내신성적 상위 50%에 드는 학생을 대상으로 지원받아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하고, 정원의 20%는 소외 계층(내신성적 상위 50% 조건)에서 뽑기로 했다.
하지만 첫 자율고 입시에서는 대규모 미달 사태가 벌어졌다. 서울 시내 13개 학교는 정원 4,900여명 중 일반전형은 정원을 채웠으나 20%(979명)의 사회적배려대상자 전형에서는 추가 모집에도 불구하고 143명을 채우지 못했다. A자율고 교장은 "미달 사태를 막고자 추가 모집 때 해당되는 학생을 추천해 달라고 홍보까지 했지만 교장추천서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며 "어려운 형편의 학생들은 대체로 성적이 좋지 않은 데다 입학 후 생기는 추가 비용도 감당할 수 없어 지원이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B자율고 관계자는 "학생 수요에 대한 조사 없이 여론을 의식해 20%를 소외 계층에서 뽑기로 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허점이 드러난 것 같다"며 "사회적배려대상자 전형에서 미달하는 숫자만큼 일반전형을 추가로 실시해 결원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상자의 명확한 자격 기준을 마련하지 않은 점도 이번 사태의 원인이 됐다. 정부는 대상자를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 차상위계층 차차상위계층의 자녀로 규정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교장이 추천한 학생'이라는 예외 규정을 뒀다. 이 예외 규정 때문에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돼 버린 것이다.
자율고를 둘러싸고 '사교육을 없애려고 만들었는데 되레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다. 입시 비리만큼 뼈아픈 현실이다. 23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전국 16개 시ㆍ도교육청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 23일 공개한 자율고 위치 지역 사교육 증가 분석 자료에 따르면 자율고가 있는 전국 10개 지역(서울 제외) 가운데 8곳이 지난해 7월부터 6개월간 전국 평균인 16.6%보다 높은 개인 과외 증가율을 보였다.
박철현기자 karam@hk.co.kr
■ 입학사정관제 서류조작 의혹 등 신뢰성 '바닥'
자율고 입시에 이어 대학의 입학사정관제 전형에서도 비리 의혹이 터졌다.
서울 종로경찰서는 25일 지난해 국내 대학 수시모집 입학사정관 전형에 응시한 수험생 50여명이 브로커를 통해 추천서와 수상실적 등 제출서류를 조작한 정황을 잡고 수사중이라고 밝혔다. 현 정부 교육 개혁의 핵심 정책인 입학사정관제가 본격적인 출발 선상에서 비리 의혹을 받게 된 것이다. 수사 결과에 따라서는 큰 폭의 손질도 배제할 수 없다.
경찰은 서울 강남일대에서 활동하는 고액과외 브로커 이모씨가 학부모들로부터 수천만원의 돈을 받고 입학사정관제 전형 제출자료인 추천서와 수상 실적 등을 위조한 정황을 포착, 이씨를 26일 소환해 조사할 계획이다. 이씨는 학부모들에게 각종 대회 상장은 2,000만원, 장관이나 국회의원 명의의 가짜 추천서를 만드는 데는 300만원에서 4,000만원선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학부모는 경찰 조사에서 "이씨가 2,000만원을 주면 외국의 한 도시에서 주최한 글짓기대회 입상경력 서류를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지난해 입학사정관제 모집 기간을 앞두고 이씨와 통화한 기록이 있는 고3 학부모를 조사해 부정 입학 의혹이 있는 학생들을 50여명으로 추렸다고 밝혔다. 경찰은 해당 학생들의 대학 지원 및 합격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76개 대학에 입시 자료 제공을 요청했으며 이 중 50개 대학의 자료를 건네받아 10명 안팎의 학생들이 실제 입학사정관 전형에 지원한 것을 확인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를 불러 돈을 받고 추천장을 조작했는지 등을 집중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들 학생들이 가짜 추천서 등으로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실제 합격한 것으로 확인된다며 입학사정관제의 신뢰성에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입학사정관제는 현 정부의 핵심적인 대학 입시 정책으로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재작년 4,555명에 불과하던 입학사정관제 선발 인원은 2만4,622명으로 대폭 늘었고, 올해는 3만7,628명으로 확대돼 신입생 10명 중 1명꼴이 된다. 정부는 입학사정관제가 성적 외에 학생의 창의력과 잠재력을 입학 전형에 반영해 기존 입시 제도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보고 지원을 대폭 늘려왔다. 2007년 20억원에 불과하던 입학사정관제 관련 예산은 올해 350억원으로 늘었다.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말쯤엔 100%에 가까운 대학이 입학사정관제로 학생을 선발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해 교육계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입학사정관제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대한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됐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작년 9월 교사와 학부모 1,2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학부모의 80.5%, 교사의 83.1%가 '입학사정관제는 자립형사립고나 특수목적고 학생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입학사정관제가 계층 간 교육 격차를 완화할 것'이라는 항목에 대해서도 학부모의 77.7%, 교사의 75.9%가 부정적으로 답했다. 입시 부담의 경우 학부모의 80.3%, 교사의 82.8%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의 입학사정관제 도입 취지였던 사교육비 절감에 대해서도 평가는 좋지 않았다. 학부모들의 85.3%가 '사교육비 절감 효과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사실 사교육 업체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서울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고액 입시컨설팅을 해 주는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해 입학사정관제가 새로운 사교육 시장을 개척한 셈이 됐다. 일선 학교에 따르면 입학사정관에게 제출할 입시 서류를 학원이 대신 써 주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자기소개서는 학생 본인이, 추천서는 담임 교사가 써야 하지만 대학마다 전형 방식이 달라 교사나 학생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액을 받고 대필해 주는 학원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정부의 추진 의지는 변함없다. 하지만 대학들은 조금 다르다. 한국일보가 서울 10곳의 주요 대학 입학처장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정부 지원이 끊긴다면 입학사정관제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의견이 30%나 됐다. 그리고 대부분 "입학사정관제 추진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한준규기자
이태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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