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어린 시절, 날이 따뜻해지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챙이 넓은 모자 쓰고 바구니를 옆에 끼고 삼삼오오 모였다. 겨우내 언 땅을 어느 틈엔가 비집고 올라온 쑥과 냉이 원추리가 아주머니 손에서 바구니로 부지런히 옮겨졌다.
멸치국물에 된장을 살살 풀고 갓 캐온 쑥을 깨끗이 씻어 넣어 한소끔 끓이기만 하면 그대로 저녁상에 오르는 쑥국이 됐다. 별다른 양념 없어도 쑥 향기 하나만으로 겨우내 움츠렸던 입맛이 거짓말처럼 기지개를 폈다.
다시 그 계절이 오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아파트 단지 정원에서도 허리 굽혀 내려다보면 입맛 살리는 풋풋한 향이 곧 올라올 게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견뎌낸 탓인가. 느긋하게 기다리기엔 몸이 달아 이른 봄을 만나봤다. 역시 어린 시절 그 향 그대로였다.
원추리와 봄나물 트리오
살다 보면 참 걱정거리 많이 생긴다. 몇 달 동안 영하의 추위에 움츠려 지내고 나면 근심의 무게가 어깨를 더 짓누르는 것 같다. 옛 사람들은 이럴 때 원추리나물을 먹었다. 원추리는 노란색 주황색 섞여 피는 꽃이 하도 예뻐 보고 있으면 근심이 다 사라진다고 해서 망우초(忘憂草)라고도 불렸다.
살짝 데친 원추리는 다진 마늘 들어간 생청국장 양념과 잘 어울린다. 원추리에 무쳐진 생청국장은 색깔도 냄새도 잘 드러내지 않다가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비로소 존재감을 알린다. 소금기 없는 자연스러운 짭짜름함이 나물에 살짝 배어 순수한 봄 느낌을 빚어낸다.
요즘 대형마트나 시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봄나물 중 하나가 바로 냉이다. 봄철에 살짝 입을 벌린 조개와 흰 뿌리 여럿 달린 냉이가 동동 떠 있는 된장국 한 그릇 안 먹고 지나가면 뭔가 잊은 듯 서운하다. 대부분의 봄나물은 국을 끓이면 금방 숨이 죽어 죽처럼 퍼져 버린다. 하지만 냉이는 비교적 오래 숨이 살아 있다. 아무 길가에서나 밟아도 솟아나며 유달리 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때문일까.
정성을 좀 더 보태 냉이로 색다른 맛을 연출하고 싶다면 연어가 좋을 듯하다. 분홍빛 얇은 연어 살 한 점을 펴고 숨이 완전히 죽지 않도록 가볍게 데쳐낸 냉이를 얹은 다음 돌돌 말아낸다. 한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 냉이 특유의 향이 연어의 비릿함을 가리며 상큼한 봄 느낌을 돋운다. 굳이 밥 없이도 간식으로 일품이다. 냉이 하나로 심심하다면 달래 같은 몇 가지 봄나물을 함께 말아도 좋겠다.
냉이랑 달래 나왔으면 씀바귀 빠질 수 없다. '달래 냉이 씀바귀 모두 캐보자'하는 동요 '봄맞이 가자'의 그 봄나물 트리오 말이다. 옛 사람들은 봄에 씀바귀를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파 마늘 다져 넣은 초고추장 양념에 무쳐도 씀바귀는 이름처럼 씁쓰름하다. 과장 조금 보태면 초고추장 맛이 가려질 정도다. 좀 덜 쓰게 먹는 방법도 있다. 씀바귀를 데친 다음 찬물에 하룻밤 정도 담가두면 쓴 맛이 어느 정도 빠진다.
봄 내음 살려주는 요리법
봄나물 요리법은 별다를 게 없다. 끊는 물에 굵은소금을 넣고 나물을 살짝 데친 다음 찬물에 헹궈 물기를 꼭 짠다. 이걸 미리 준비해둔 양념에 조물조물 무치면 그만이다. 손도 많이 안 가고 오래 걸리지도 않고 쉬워 보인다.
하지만 요리를 해놓고 나면 이런 생각 달아난다. 초보와 전문가의 손길은 이렇게 간단한 요리법에서도 미묘하게 차이를 보인다. 전문가에게 비결을 들어보니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양념에 들어가는 각 재료의 역할을 세밀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진간장과 소금은 구분해 쓴다. 허성구 서울프라자호텔 선임주방장은 "진간장은 흐트러지는 것을 뭉치게 할 때, 소금은 반대일 경우 사용하는 편"이라고 귀띔했다. 또 간장을 넣었는데도 간이 조금 모자라다 싶을 때는 다시 간장을 넣기보다 고운소금을 쓰는 것도 봄나물의 맛을 살리는 센스다.
두 번째 비결은 봄나물의 참 맛을 가능한 그대로 살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씀바귀가 쓰다며 입맛에 맞추자고 설탕 듬뿍 넣는 것보다 간을 약간 덜 하는 편이 오히려 더 맛이 난다.
허 주방장은 "최근 한 TV 드라마에서 배우 류시원씨가 요리사로 나와 선보인 '마크로비오틱'이라는 트렌드가 봄나물과 딱 들어맞는다"고 말했다. 크다는 뜻의 영문 '마크로(macro)'와 생명을 의미하는 '바이오(bio)', 방법을 말하는 '틱(tic)'의 합성어인 마크로비오틱은 제철에 나는 신선한 재료를 변형하지 않고 통째로 먹는 요리법을 일컫는다.
실제로 봄나물은 아무 양념도 하지 않은 채 씻기만 해서 상에 올리기도 한다. 통째로 소스에 찍어먹을 수 있게 말이다. 바로 이럴 때도 초보와 전문가의 손길이 차이 난다. 소스로 샐러드용 드레싱이나 초고추장을 내놓으면 어쩔 수 없는 초보.
허 주방장은 유자드레싱을 만들었다. 가을에 난 유자를 얼려뒀다 이맘때쯤 해동시켜 양파와 함께 강판에 간다. 여기에 간장과 올리브오일을 섞어 완성한 유자드레싱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봄나물의 맛을 살짝 보완해준다. 특히 환절기에 먹는 유자는 더 값지다. 비타민C가 바나나의 10배, 레몬의 3배 이상 들어 있으니 말이다.
요즘 대형마트나 시장에 나온 봄나물은 사실 하우스에서 난 게 많다. 3월 초 노지에서 나는 첫 순을 뽑은 게 진짜 봄나물이다. 실제로 하우스산은 노지산에 비해 봄나물 특유의 향이 덜하다. 노지에서 마구 자란 어린 순이 봄나물의 참 맛을 낸다는 얘기다.
수십 년간 한식을 만들어온 전문가들은 재배기술의 발달로 옛날보다 일찌감치 달래나 냉이를 먹을 수 있게 됐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봄나물을 찾는 손길은 점점 줄고 있어 아쉽다고들 한다.
그 이유를 서양 음식문화에서 들어온 갖가지 허브에서 찾기도 한다. 부드럽고 화사한 식용 꽃잎 향에 익숙해진 젊은 입맛에겐 야생 그대로의 쌉싸름한 봄나물 향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게 아닐까 하는 설명이다.
중구 태평로 서울프라자호텔의 뷔페 레스토랑 '세븐 스퀘어'에서는 3월 2∼20일 10가지 봄나물로 만든 특별 메뉴를 선보인다.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 중식과 일식에도 봄나물이 빠지면 '섭섭'
중국과 일본에서도 이맘때쯤 되면 봄나물 들어간 음식이 많은 사랑을 받는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과 삼성동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호텔의 중식당과 일식당에선 다음달부터 봄 내음 나는 이웃나라 음식들을 본격 선보일 예정이다.
중국 3대 진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상어지느러미(샥스핀)는 두릅과 함께 쪄내면 잘 어울린다. 샥스핀과 두릅은 원기회복과 자양강장에 좋은 식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재료가 한 접시에 담기면 시너지 효과를 낼 터. 두릅은 특히 면역력에 도움이 되는 사포닌과 섬유질 칼슘 철분 비타민도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다.
자장면과 함께 친근한 중국요리의 대명사 짬뽕도 봄철엔 변신을 한다. 짬뽕 하면 떠오르는 얼큰하고 진한 육수가 아닌 담백하고 맑은 국물에 면을 담근다. 이 국물 맛의 비결은 바로 냉이다. 중국산 냉이는 한국산보다 향이 좀 덜한 편. 덕분에 오히려 면 고유의 구수함이 가려지지 않는다.
일본음식 하면 생선 회. 봄엔 특히 도미가 제철이다. 성년기에 들어가는 3∼4월 무렵 봄 채소와 함께 먹는 도미는 단백질이 가장 많고 지방은 가장 적어 최고의 맛을 뽐낸다. 튀긴 생선엔 향긋한 쑥 냉이 달래를 곁들여 내고, 생선을 찔 땐 소금에 절인 벚나무 잎을 함께 넣는다.
임소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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