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 장애인분의 진술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청 OK민원센터에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구청 인근 서초경찰서에서 농아인들 간에 금전문제를 놓고 시비를 가리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담당형사와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수화통역사 이명순(43)씨는 바로 서초서로 향했다.
이씨는 7년째 서초구청에서 청각장애인들의 입과 귀가 되고 있는 베테랑 수화통역사다. 농아인들이 불편을 겪고 있는 곳이면 경찰서, 병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 손발이 돼 준다.
농아인들이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홈쇼핑 물건을 사 달라', '중국집에 자장면을 시켜달라'등의 부탁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해준다. 그는 "수화통역사는 농아인이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간다"고 말했다.
이씨는 현재 서울농아인협회 소속으로 서초구청에 파견 근무 중이다. 수화통역은 본래 무보수 자원봉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3~4년 전부터 서울 일부 구청에서 대민 봉사자로 채용돼 일정 보수를 받고 근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렇지만 100만원 안팎의 열악한 처우로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수화통역사는 농아인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열정과 사명감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어요."
이씨가 수화통역을 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이다. 단지 듣지 못해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농아인들을 기피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을 가누기 힘들다. 이씨는 "농아인들은 사회적 차별로 겪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청각장애를 대물림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2003년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평소 봉사에 관심이 많았던 이씨는 교회에서 무료 강습이 있어 봉사도 하고 배우기도 할 수 있어 수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낯설고 서툰 수화였지만 농아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수화통역에 빠져들었습니다."
수화통역사들은 경찰서와 법원 출장을 가장 꺼려한다. 법률 용어 통역이 어려운데다가 상황이 농아인에게 불리하게 될 경우 그 책임이 자칫 수화통역사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법조타운이 조성돼 있는 서초지역의 경우 경찰과 검찰 등에서 이씨를 찾는 일이 잦다.
"한 농아인분은 제가 수화통역을 잘못해 죄를 배로 받게 됐다면서 폭언을 하더군요." 이씨는 수화통역사 초기에는 실망감으로 일을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의 후원에 힘을 얻었다. 남편은 지금도 퇴근 한 늦은 밤에 농아인의 긴급호출 전화가 걸려오면 기꺼이 운전사 역할을 할 정도로 봉사하는 이씨를 자랑스러워 한다. 부부의 이런 모습에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씨의 자녀들도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농인들이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수화로 말하는 순간 고통은 싹 잊어버리죠. 봉사는 이런 맛에 하는 건가 봐요."
박관규 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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