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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10년 만에 첫 장편 '재와 빨강' 낸 소설가 편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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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10년 만에 첫 장편 '재와 빨강' 낸 소설가 편혜영

입력
2010.03.0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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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계의 어두운 심연을 선명하게 묘파하는 '그로테스크의 미학'으로 개성적 문학 세계를 구축해 온 소설가 편혜영(38)씨가 장편 <재와 빨강> (창비 발행)을 발표했다. 편씨가 등단 10년 만에 발표하는 첫 장편으로, 전염병 비상이 걸린 이국에서 비참하게 고립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특유의 잔혹미와 치밀한 구성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편혜영 소설의 결정판"(평론가 차미령)이라는 호평이 나온다.

외국계 제약회사 사원인 주인공은 본사가 있는 C국에 파견된다. 지사장 승진 코스라며 사원들 간에 치열한 물밑 경쟁이 벌어졌던 본사 파견직을 그가 따낸 것은 회식 자리에서 솔선해 쥐를 때려잡는 모습이 윗사람 눈에 들었기 때문. 그는 실패한 결혼 생활을 잊고 C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겠노라 다짐한다. '행운의 쥐사나이'라는 동료들의 질투 섞인 비아냥을 뒤로 하고 C국에 입국한 기쁨도 잠시, 그는 공항에서 전염병 의심 환자로 분류돼 당국의 관리 대상이 되고, 본사의 파견 담당 직원 '몰'과는 "당분간 출근하지 말고 쉬라"고 통보 받은 것을 끝으로 연락이 끊긴다.

주인공이 C국 방역본부, 본사가 행사하는 배제의 권력에 떠밀려 노숙자로 전락해가는 모습은 절로 카프카 소설 <소송> 의 주인공 K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입국 직후 집에 방치해둔 애완견을 떠올린 주인공은 동창생 유진에게 뒤처리를 부탁했다가, 그의 집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전처와 개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유진의 전화를 받는다. 출국 전날 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손엔 온통 멍이 들어 있다. 그는 더 이상 선의의 피해자가 아니며, 그것으로 인해 소설은 한층 깊어진다.

쓰레기를 태운 검은 재와 흰 소독약이 섞여 늘 희뿌연 C국의 거리에서 주인공은 두 번의 살인을 더 저지르고서야 쥐를 잡는 임시직 방역원으로 평온한 일상을 되찾는다. 그가 쥐 퇴치약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동료에게 웃음 짓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부조리한 상황을 딛고 끝내 살아남은 한 남자의 생존과, 씻지 못할 악행을 거듭하며 극약에도 죽지 않는 쥐와 같은 존재가 돼 버린 그의 몰락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런 뜻에서 제목의 '빨강'은 재 속의 불씨 같은 질긴 생명력이자 주인공의 손을 물들인 피로 중의적으로 읽힌다.

지난해 5월 집필을 시작, 4개월 만에 초고를 썼다는 편씨는 "주인공의 몰락을 통해 잘해보려 할수록 미궁에 빠져 삶을 망치는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설 속에 인용된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공짜는 없다'는 이런 작가의 의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때마침 발생한 신종플루 사태는 작품 배경 설정에 힌트가 됐다. "홍콩 사스를 모티프로 했던 단편 '아오이가든'이 질병으로 초토화된 사회를 그렸다면, 이번엔 전염병이 여러 권력의 개입과 풍문으로 부풀려진 채 일부 사람들만 불행에 빠뜨리는 측면을 형상화했다."

"첫 소설집 낼 때처럼, '빨리 나왔으면' 혹은 '영영 안 나왔으면' 하는 기분이 번갈아 들었다"는 말로 첫 장편 발표 소감을 밝힌 편씨는 최근 출간된 계간 '문학과사회' 봄호에 두 번째 장편 '서쪽 숲에 갔다' 연재를 시작했다. 올 가을께 세 번째 단편집도 출간할 계획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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