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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거룩한 속물들' 욕망의 유혹에 못 이겨 속물이 돼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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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거룩한 속물들' 욕망의 유혹에 못 이겨 속물이 돼버린…

입력
2010.03.0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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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종 지음 / 뿔 발행ㆍ260쪽ㆍ1만원

서울의 한 사립대 사회복지학과 3학년인 기린은 동급생인 명, 지은과 항상 붙어 다닌다. 사회 생활에 부대끼기 싫어 유학을 준비하는 '너무 돈이 많아 고상한 속물'인 명, 조건 좋은 남자들과의 연애에 탐닉하는 '그냥 원래 속물'인 지은에 비해 기린은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려 네댓 건의 과외를 해야 하는, '너무 돈이 없어 비루한 속물'이다. 두 친구와 백화점에 가고 비싼 밥과 커피를 먹느라 신용 불량자가 될 지경이면서도 기린은 그들과 어울리며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만족감과 안도감'을 포기할 수 없다.

소설가 오현종(37)씨의 네 번째 장편 <거룩한 속물들> 은 기린을 화자로, 돈과 욕망에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속물들이 판치는 지금 한국 사회의 세태를 경쾌한 문장으로 보여준다. '가난은 조금 불편한 것이 아니라 죽도록 불편한 것'이며 '생각은 명랑한 인생의 적'이라고 여기는 세 여대생의 모습을 통해 작가 오씨는 이들의 속물성이 고상함의 외피조차 거부하는 적나라한 욕망이라는 점에서 스노비즘과 다르고, 선천적 기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터득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속물근성과도 다른, 새로운 '생의 감각'이라고 묘파한다.

우리 안의 속물성을 찾아내는 작가의 밝은 눈은 기린의 가족과 친척으로 확장, 속물주의가 오늘날 세대를 아우르는 시대정신과 다를 바 없다고 폭로한다. 명문대를 나온 기린의 아버지 기동은 거듭된 사업 실패로 기울어진 집안을 내팽개치고 돈 많은 과부 남 여사와 눈이 맞아 가출한다. 기동의 친구는 되레 그의 불륜과 무책임을 두둔한다. "늘그막에 로또를 맞았구나, 네 놈이. 네가 싫으면 남 여산지 님 여산지 당장 나한테 넘겨라."

백수인 기린의 언니는 하루 종일 TV에 빠져 살면서 제 욕망을 화면 속 화려한 가짜 세계에 투영한다. 나이트클럽을 다니며 남자를 물색하던 기린의 사촌은 대학 졸업반이 되자 대형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최소한의 고뇌도 없이 욕망에 투신하는 이들의 초상은 소설 제목처럼 과연 '거룩하다'.

졸업도 하기 전에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방송국 구성작가로 취직한 기린은, 그러나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 이끌려 자발적 실업자가 돼서 졸업식을 맞는다. 예비 의사라는 이유로 애정도 없이 사귀었던 의대생 동수와도 헤어진다. "좁은 틈에 나를 막 끼워 넣다가 내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된 것 같아요. 근데 그렇게 나를 알게 되는 게 겁이 나요. 그런 거 이해하시겠어요?" 물질주의의 자장에 갇힌 우리 시대의 성장소설은 이렇게 쓰여진다.

대학 졸업 무렵 방송작가로 일했던 것 등 작가의 실제 경험이 얼마간 반영됐다는 점에서, 이번 소설은 오씨가 지난해 발표한 장편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 과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일단 책을 손에 들면 좀체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 있는 서사는 작가가 공들여 다듬은 매끄러운 문장에서 비롯된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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