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오전 10시쯤, 나는 동숭동의 문리대 본관 1층 삐거덕거리는 낡은 교실에서 권중휘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당시 나는 독문과 1년생이었는데, 선택 과목으로 ‘영미 수필 강독’을 수강했던 것이다.
그날따라 교정에서는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아침부터 그치지 않았다.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3ㆍ15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문리대 교정까지 닥쳐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면학파 학생들은 강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강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교실 문이 난폭하게 열리며 상급생 간부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학우 여러분!” 현수막을 말아 쥔 막대기로 그는 책상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의 선동이 학생들을 운동장으로 몰아냈다.
교과서와 사전과 도시락이 들어 있는 불룩한 가방을 귀중하게 한 손에 든 채,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으로 행진해 나갔다. 요즘 같으면 미련하게 가방을 들고 데모하러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정문 앞 다리를 건너 선두가 왼쪽으로 방향을 잡자 구름다리 쪽에서 법대생들이 합류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멋모르고 앞장을 서는 것은 으레 1학년 초년생들이다.
연건동 입구에 이르렀을 때 곤봉을 든 경찰과 마주쳤다. 경찰관 아저씨들이 설마 우리에게 손을 대기야 하겠느냐는 순진한 기대는 호각 소리와 함께 여지없이 깨어졌다. 그들은 경찰봉으로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선두에 끼였던 덕택에 난생 처음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교문 안으로 쫓겨 들어왔다. 가방도 잃어버리고, 입학 기념으로 받은 손목시계도 간 곳이 없고, 감색 교복도 팔 한 쪽이 찢어져나갔다. 왼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오른쪽 옆구리는 뜨끔거렸다. 나보다 더 다친 학생들도 많았다.
피를 본 학생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이 대열은 오후 늦게 대통령 관저 경무대를 향하여 적선동까지 행진해 갔다. 시위 대열이 효자동 쪽으로 접근하자, 경찰이 발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포인 줄 알았는데, 실탄 사격이었다. 지금은 수유리에 누워 있는 몇몇 학우를 우리는 그곳에서 잃었다. 바로 이 날의 시위현장을 신동문(1927~1993)의 시 ‘아! 신화같이 다비데 群들’에서 볼 수 있다.
‘서울도/ 해 솟는 곳/ 동쪽에서부터/ 이어서 서 남 북/ 거리거리 길마다/ 손아귀에/ 돌 벽돌알 부릅 쥔 채/ 떼 지어 나온 젊은 대열/ 아! 신화같이/ 나타난 다비데 群들// 혼자서만/ 야망 태우는/ 목동이 아니었다/ 열 씩/ 백 씩/ 천 씩 만 씩/ 어깨 맞잡고/ 팔짱 맞끼고/ 공동의 희망을/ 태양처럼 불태우는/ 아! 새로운 신화 같은/ 젊은 다비데 群들//… // 빗살 치는/ 총 알 총알/ 총 알 총 알 총알 앞에/ 돌 돌/ 돌 돌 돌/ 주먹 맨주먹 주먹으로/ 피비린 정오의/ 포도에 포복하며/ 아! 신화같이/ 육박하는 다비데 群들’
더러 한자가 섞여 있던 것을 필자가 고쳐서 인용했지만, 여기에 담긴 ‘거친 목소리는 당대성과 현장성에 충실한 참여시학의 첨예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따라서 당시 산출된 많은 혁명 기념 시 가운데서도 가장 역동적인 인상을 남긴 시편으로 기록되고 있다’(평론가 유성호). 간결한 어휘와 리듬의 활력으로, 이 시는 발표된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그 호흡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같은 해 5월 18일, 김수영(1921~1968)은 ‘4ㆍ19 순국학도 위령제에 붙이는 노래’에서 혁명과 반동을 예감하고 그 변질을 다음과 같이 우려했다.
‘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戀人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革命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大自然의 法則을 본받아/ 어리석을 만치 素朴하게 성취한/ 우리의 革命을/ 배암에게 쐐기에게 쥐에게 삵괭이에게/…/ 다치지 않고 깎이지 않고 물리지 않고 더럽히지 않게’
4ㆍ19 이후 한 달 동안 격동하는 사회현실에 대한 시적 자아의 내면적 성찰이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비록 한자가 섞이기는 했지만, 생동하는 언어의 반복적 구사와 대담한 직정적 표현을 음미해 보면, 이 시 또한 우리의 동시대 작품으로 읽힌다. 김수영의 난삽한 초기 시와 순 한글로 씌어진 후기 시(예컨대 ‘풀’ 같은 작품)를 가름하는 4ㆍ19 혁명이 우리 시문학사에서도 분수령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뒤이어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이 탄생하고, 수많은 ‘4ㆍ19 사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정작 4월 19일 데모의 선두에 섰던 우리들은 아무것도 달라진 바 없는 1학년 대학생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가 한국의 현대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든지, 우리의 힘으로 새 공화국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겠다든지 하는 거창한 자부심은 없었다. 현실 참여의 역사적 당위성보다는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같은 대학 초년생의 개인적 고민이 우리의 솔직한 당면 관심사였다.
1960년대 말에 세계적으로 대학생 저항 운동이 일어났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4ㆍ19는 이미 60년대 초에 그 서막을 여는 전위적 역할을 선취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몇몇 정치 지망생들을 빼놓고는 4ㆍ19 세대 가운데서 스스로 ‘다비데’를 자처하거나, 그 혁명적 의미를 과장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가자 대학생들은 싸리비를 들고 데모로 어수선해진 길바닥을 청소한 다음, 겸손하게 학교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에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ㆍ16 쿠데타가 일어났고, 집권 군부세력은 4ㆍ19 정신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물질적 근대화의 기치를 내세웠다. 이리하여 자유당 독재를 타도하고 자유의 쟁취에 앞장섰던 4ㆍ19 세대는 정작 군사 독재정권 치하에서 그 인생의 황금 같은 이삼십대를 보내게 되었다. 그동안 그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환멸을 반추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사회 각 분야에서 중견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처럼 4ㆍ19 학생 세대가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로 늙어가는 동안, 4ㆍ19 자체도 ‘의거’와 ‘혁명’ 사이에서 그 의미가 굴절되고 그 평가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나 4ㆍ19 세대는 늙어가도 4ㆍ19 의 여진은 끊임없이 이어져갔다. 1970년대 유신정권과 마주서서 싸우고, 1980년대 전반의 제5공화국 강권 통치에 끈질기게 항쟁한 젊은이들이야말로 4ㆍ19 정신의 후예들 아닌가.
졸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이른바 유신시대 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4ㆍ19 세대의 지식인이 느꼈던 좌절과 절망을 정직하게 토로함으로써 내 나름대로 당시의 상황을 인식해보고자 했던 작품이다. 4ㆍ19 세대의 부끄러운 만가라 할 수 있는 이 시가 세대를 초월하여 널리 읽히는 까닭은 아마도 거짓 희망을 노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가 씌어진 1979년에는 부마항쟁에 뒤이어 10ㆍ26 사태가 일어났고, 계엄 선포와 군부 검열 때문에 주요 계간지와 월간지가 갑자기 폐간되고, 단행본 출간도 금지나 다름없는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때 권력의 진공 상태 속에서 잉태된 희망은 다음해 5월에 무참히 깨어지고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압 정치가 시작되었다. 4ㆍ19 세대는 또다시 암울한 사십대를 살아가야 할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아무리 억눌려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났다. 60년대에 태어난 그 젊은이들의 핏줄 속에 흐르고 있는 4ㆍ19 정신을 발견하고, 나는 가느다란 희망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82년 검열의 그물망을 뚫고 발표된 졸시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끊임없이 진리를 따르는/ 자랑스러운 후배’들에게 보내는 조용한 찬가였다.
‘굳어버린 껍질을 뚫고/ 따끔따끔 나뭇잎들 돋아나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 성난 함성이 되어/ 땅을 흔들던 날/ 앞장서서 달려가던/ 그는 적선동에서 쓰러졌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날부터/ 그는 끊임없이 일어나/ 우리의 앞장을 서서/ 달려가고 있다’
김광규 시인은 “4ㆍ19 세대는 늙어가도 4ㆍ19의 여진은 계속돼 그 정신이 1970년대 유신정권, 1980년대 군부 강권통치에 맞서 항쟁한 젊은이들에게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약력
▦1941년 서울 출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1980~2006년 한양대 독문과 교수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 산문집 <육성과 가성>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 , 학술서 <귄터 아이히 연구> 등 ▦김수영문학상, 대산문학상, 이산문학상, 독일 프리드리히 군돌프 문학상 등 수상 ▦현 한양대 명예교수 귄터> 천천히> 육성과> 시간의> 처음> 가진> 아니다> 우리를>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ㆍ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