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해마다 봄이 되면-조병화)’. 누런 겨울 빛에 몸도 마음도 지칠 때쯤이면 이 시구가 더없이 간절해진다. 하루 빨리 겨울의 나른함을 떨쳐내고 약진하는 기운을 갖고 싶은 소망이 간절해지는 때, 입춘도 지나고 우수도 지나 막 3월이 눈앞인 지금이다.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봄, 아직 땅 위의 봄은 그 부지런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땅 위의 봄이 오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말 그대로 땅 속에서의 부지런함이다. 지난 가을, 나무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몸 속의 물을 최대한 줄였다. 물이란 곧 얼음으로 변해 몸의 세포들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이 빠져버린 겨울나무는 마치 지푸라기처럼, 장작처럼 말라 있었다.
나무가 땅 위의 봄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몸 속을 물로 채워야 한다. 소위 물이 올라야 하는 것이다. 물은 그 자체로 나무의 형태를 잡기도 하지만 바야흐로 나무에게 필요한 양분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 되며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매개 역할도 한다. 물이 없이는 생명 현상도 있을 수 없다. 봄에 우선하는 것은 지상의 빛이 아닌 지하의 물기다.
나무든 풀이든 모든 식물은 궁극적으로 뿌리로부터 물을 흡수한다. 통상적으로 나무의 뿌리는 지상의 잎이 피기 2주 전부터 활동을 시작한다. 우수를 지나면서 얼었던 땅이 풀어지기 시작하면 뿌리들도 긴 잠에서 깨어나 녹아나는 물기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늘진 곳에는 더러 잔설도 있고 얼음도 끼어 있지만 이미 뿌리는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봄은 신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뿌리로부터 시작된다.
미미한 잔뿌리들로부터 모아진 물이 지상의 줄기를 타고 오르면 지푸라기 같은 줄기들은 부풀어 오르고 윤기를 발한다. 가지 끝의 눈으로 충분한 물이 모이고, 양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서야 비로소 어린잎이 눈 껍질을 벗어낸다. 그러니 땅 속의 부지런함이야말로 봄의 제일 부지런함이다. 생각해 보면 줄기에 꽂힌 관을 통해 흘러나오는 고로쇠나무 수액은 일찍 깨어난 뿌리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들은 결코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수명은 2주에서 한 달 정도로 매우 짧아 지상의 눈이 신록을 쏟아낼 때쯤이면 이미 새로운 뿌리로 교체된 후다. 어디서나 눈에 보이지 않게 부지런함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숨은 노동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언젠가 흐트러진 가지를 정리하기 위해 가위로 잘라낸 개나리의 마른 줄기 속을 푸른 물이 지나가고 있던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간절하게 기다리던 봄이 보이지 않는 줄기 속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것은 지푸라기 같은 가지라도 살아 있는 가지와 죽은 가지가 만들어내는 촉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죽은 가지는 햇살이 그대로 가지에 고여 따뜻한 느낌을 만들어내지만 살아 있는 가지는 여전히 차가운 느낌을 준다. 가지 속을 흐르는 물기는 가지의 온도가 지나치게 올라가는 것을 방지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조직은 결코 따뜻한 느낌을 주지 않고 오히려 서늘한 느낌을 준다. 삶의 열정이 강할수록 나무의 몸은 차갑게 유지된다.
실눈을 흐릿하게 뜨고 나뭇가지를 바라보라. 혹시 푸른 물기가 비치지 않는가. 줄기를 만져보라. 한겨울보다 차갑지 않은가. 해마다 봄이면 나무의 뿌리는 항상 부지런했다. 우리도 부지런해져야 할 때인 것이다.
차윤정 생태전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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