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제대로 붙어서 이겨볼래요."
이승훈(22ㆍ한국체대)은 잔뜩 자세를 낮췄다. 24일(한국시간) 1만m 금메달로 전세계 스피드스케이팅계를 발칵 뒤집었지만, 벌써부터 다음을 준비했다. 아시아에서 나온 종전 올림픽 1만m 최고성적은 시라하타 게이지(일본)의 4위(2002년 솔트레이크시티대회).
이날 2, 3위 선수들에게 번쩍 들어올려져 '살인미소'와 함께 꽃다발을 흔든 이승훈은 믹스트존에서 한국 취재진을 발견하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스스로 흥을 돋웠다. 이승훈은 "진짜 좋아요"를 연발하다가 이내 표정을 바꿔 다음 숙제를 얘기했다. "당장 다음 시즌부터 크라머와 제대로 붙어서 이기고 싶어요." 1만m 세계기록(12분41초69) 보유자 크라머는 이승훈보다 앞선 기록으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으나 코스 체인지 실수가 밝혀져 실격됐다.
"코치님이 크라머의 실수를 알려줘 금메달임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는 이승훈은 "실수만 없었다면 크라머가 이기는 경기였다"며 나이답지 않은 냉철한 모습을 보였다. '레이스 전 금메달을 조금이라도 기대했느냐'는 질문에 이승훈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메달 후보로 꼽히지도 않았고, 그저 부담 없이 편하게 타려는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절친한 친구인 모태범과 이상화가 앞서 나란히 금메달을 딴 것도 동기 부여에 도움이 됐다고. 이승훈은 "좋은 자극제가 된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모)태범이와 서울 시내를 다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보나 확인하고 싶다"며 웃었다. 모태범은 이날 이승훈이 레이스를 마치자마자 전화해 "너, 무조건 금메달"이라고 분위기를 띄웠단다.
이승훈은 5,000m 때 은메달을 암시한 꿈 얘기도 뒤늦게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5,000m 경기 전날 꿈을 꾸셨대요. 눈앞에 금메달이 보이는데 끝내 놓치셨다고 하더라고요." 쇼트트랙에서 전향해 '성공신화'를 쓴 이승훈은 여전히 '옛사랑'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다. "정말 재미있는 종목이거든요.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다음 올림픽에 출전한다면 또 스피드스케이팅으로 나가고 싶어요."
밴쿠버=양준호기자 pir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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