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함께 일해요"
독일 하노버 북부의 귀테슬로우. 인구 9만 명의 전형적인 시골 도시 느낌이 드는 아담하고 조용한 이 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튼튼하고 성능 좋은 가전제품을 만드는 밀레(Miele) 본사가 있다. 도시 곳곳에 밀레의 상징인 빨간 색 마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칼 밀레와 라인하르트 진칸 두 사람이 1899년 창업, 1901년 세계에서 처음 참나무통 세탁기를 만든 회사다. '평균 제품 수명 20년'이라는 탁월한 내구성으로 '가전의 벤츠'라 불리고 있다. 독일 가전 업계의 부진 속에서도 해마다 매출 성장을 거듭해 4조5,000억원(2008년)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전체 매출의 70% 가까이를 해외 판매에서 거둘 정도로 전 세계가 품질의 우수성을 알아주고 있다.
밀레의 생산을 총괄하는 마이놀프 레베캠프(46)씨는 밀레의 성공비결에 대해 "끊임 없는 기술 혁신이 핵심"이라고 했다. 밀레의 경영 모토는 '임메 베제르(immer besser)'. 영어로 포에버 베터(Forevere better)로, 항상 더 좋은 제품을 만들자는 뜻이다. 그리고 "혁신의 주인공은 1만6,000여 명 밀레 패밀리 전부"라고 강조했다.
패밀리라는 말이 낯설어 다시 설명을 부탁했다. 크리스티안 마르크만(36) 인사총괄은 "밀레에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 4대가 함께 일하는 경우가 흔하다"며 "이 지역 젊은이는 밀레와 함께 자란다 해도 과언이 아니고 밀레에서 일하는 걸 뿌듯해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이들을 위해 밀레리안(Mieleian)이라는 말이 쓰일 정도라고 한다.
실제 생산 현장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이상의 직원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레베캠프씨는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셈"이라며 "일종의 전통 도제식 교육"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밀레에서 25년 이상 경력을 지닌 직원들이 1만 명이 넘는데 이들 모두가 현장의 선생님 역할이다.
밀레는 여기에 더해 '전문 도제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초중고 의무 교육을 마친 16세 이상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29가지의 현장중심 기술 교육을 실시하고, 교육 후 희망자를 대상으로 까다로운 선발과정을 거쳐 정규 직원으로 채용한다. 2007년에는 457명의 교육생 중 264명이 밀레리안이 됐다.
특히 이들의 교육을 위해 경력과 기술력을 갖춘 교육책임자들이 늘 머물고 있다. 깐깐한 과외 교사로부터 '1대 1' 교육을 받듯 가르침을 받고, 추가 교육이 필요할 경우 따로 보충수업까지 실시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하는 생산현장 직원을 대상으로 1995년부터 사내대학 프로그램도 가동 중이다. 과학, 전기전자, 기계설비, 생산기술, 디자인 분야 등을 현장 실습 교육과 대학의 이론 교육을 병행, 학위를 받도록 하는 것. 아울러 매니저급 이상의 주요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술학위'가 필요한데 이 역시 입사 후 사내 교육을 통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밀레는 이런 사내 교육을 통해 성장한 직원들을 대상으로 60년 전부터 '내부제안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공장 내 설비 도안, 작업 환경 개선, 생산 과정의 환경 문제 등 갖가지 주제에 대해 수준 높은 제안이 쏟아지고 이를 실제 생산 현장에 적용, 원가 절감 효과 등을 얻고 있다.
레베캠프씨는 "대학을 안 다녀도 회사 내 교육 프로그램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마이스터(Meister, 기능명장)가 되고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다"며 "나 역시 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다"며 웃었다.
귀테슬로우(독일)=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 독일 기술인력 교육 '아우스빌둥'
독일 중부 튀링겐주 최대 도시 에르푸르트 직업학교(ebz)의 강의실. 스무 명 남짓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물리학 수업이 한창이다. 쉽지 않은 이론 수업이지만 학생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하다. 우베 하이버 교장은 "생산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실습생들"이라며 "이런 과정을 두루 거치면서 부족한 이론을 보충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독일 기술 인력 교육은 아우스빌둥(Ausbildung)으로 요약된다. 여기에는 현장(실습), 직업학교(이론)가 쌍둥이 마냥 나란히 있다. 10년 동안 의무 교육을 끝내고 만 16세가 되면 3년 동안 기업 생산 현장에서 레어링(Lehring), 아쭈비라 불리는 실습생으로 일을 하면서 1주일에 한두 번 직업 학교에서 이론 수업을 듣는다. 실무와 이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최적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독일 사회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해마다 150만 명의 젊은이들이 아우스빌둥에 참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직업학교에서 배우는 이론은 고급 지식이라기보다는 일할 때 필요한 기본 정보 수준. 제빵사, 미용사, 자동차 정비공뿐만 아니라 치기공, 언어치료사, 사회복지사, 은행, 공무원, 경찰 등 모든 업종에서 훈련이 이뤄진다. 법조인이 되려면 대학 가서 법학 공부를 해야 하지만 법조인의 전문 비서는 직업 훈련만으로 충분하다. 실습생은 허드렛일부터 전문 지식과 기술을 차례차례 익히면서 보수도 받는다. 업종마다 다르지만 독일의 WSI 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첫 해에는 월평균 332유로(약 52만원)∼763유로(약 120만원), 마지막 해에는 442유로∼1,222유로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3년 동안 아우스빌둥을 끝내고 졸업 시험을 통과하면 350개 가량의 직종에서 게젤레(Geselle)라는 전문가가 탄생한다. 합격률은 70% 정도. 게젤레로 3년 동안 현장에서 일하면 마이스터(Meister)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마이스터가 되려면 독일상공회의소(IHK) 등 관련 기관이 운영하는 마이스터슐레라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수업을 듣고 국가가 주관하는 자격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만프레드 뮐베르크 에르푸르트 IHK 홍보담당자는 "강의는 주간, 야간, 주말에 이뤄지는 집중 코스 등 다양하다"며 "강의 내용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까다롭지만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에 열의는 대단하다"고 소개했다.
마이스터는 관련 분야뿐만 아니라 경제, 법률, 교육, 전문과정 등 총 4개 과목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릿 비간트 교육감독은 "마이스터는 자기 사업체를 꾸릴 수 있기 때문에 창업에 필요한 내용을 공부한다"면서 "또 후학을 키워야 하기 때문에 교육학도 배운다"고 설명했다.
기술 선진국 독일에서 마이스터는 각종 전문가로 확실한 대접을 받는다. 마이스터가 되면 스스로 공장, 회사를 세울 수 있고, 실습생을 가르치거나 직업 학교 교사로 일할 수 있다. 비간트씨는 "사업하는 마이스터 중 대학 나온 전문직보다 수입이 좋은 이들도 많다"면서 "정육점 주인이나 빵집 사장이 의사보다 수입이 더 많기도 하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게젤레가 마이스터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니다. 게젤레로서 일하면서 사는 게 만족스럽다면 더 공부할 필요가 없다. 이 역시 독일 특유의 실용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쌍둥이 교육 시스템의 운영에는 기업의 역할이 매우 크다. 독일에서는 중세시대 길드가 그랬듯 현장의 기술 인력은 기업이 알아서 뽑고 가르친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하고 있다. 현재 독일 기업의 절반 정도가 자체적으로 실습생을 교육하고 있다. 정부는 실습생을 많이 뽑는 기업에게 지원금을 주고 뽑지 않는 기업을 강하게 압박하는 역할을 한다.
에르푸르트(독일)=글ㆍ사진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