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이 한국을 테러 대상으로 겨냥하고 있다.'
국내에서 벌어진 파키스탄인 A(36)씨의 탈레반 조직화 기도는 이전의 탈레반 관련 사건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간 한국은 불법 외환 거래나 마약 원료 물질 밀수출 등 탈레반의 테러 자금 공급지로 활용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암암리에 한국형 탈레반 조직 결성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탈레반이 미국의 군사동맹국인 데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약속을 어기고 재파병에 나선 한국에 본때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사실 곳곳에 미군기지가 산재한 데다 올해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등 굵직한 국제회의도 열릴 예정이어서 탈레반이 노릴 만한 테러 대상은 국내에 널려 있다.
특히 위조 여권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무려 17회나 국내를 드나들며 10년 가까이 암약한 A씨의 행적은 국제 테러에 대한 우려를 짙게 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탈레반 거점 지역인 파키스탄 북서부 스왓 출신인 A씨의 국내 잠입 활동은 2001년 9월 시작됐다. 그는 당시 아프간 접경인 파키스탄 와지르스탄의 탈레반 사령관인 물라비 잘랄루딘 하카니의 차남 시라주딘 하카니로부터 "한국의 미군 시설을 정탐하라"는 지령을 받고 단기비자로 국내에 입국했다. A씨는 이후 서울 이태원동과 경북 칠곡군 왜관읍, 경남 진해시 등지의 미군기지를 주기적으로 찾아 사진 등 자료를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3년 6월 불법 체류를 자진신고 한 뒤 강제 추방되자 그간 모은 정보와 활동 사항을 탈레반 지도자 모바라크 알리에게 보고했다. 그 해 8월 A씨는 동생(31) 여권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다시 국내에 들어왔다.
신분을 세탁한 그는 이후 지방의 한 이슬람사원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성직자(이맘)이자 부인과 6남매(아들 둘 딸 넷)를 거느린 평범한 가장으로 위장했다. 그의 활동은 단순한 정보 수집 차원에서 더욱 발전했다. 이슬람사원을 거점으로 탈레반 조직화를 꾀한 것이다.
파키스탄인 등 주변 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A씨는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등 이슬람신자 30여명을 정기적으로 집단 훈련시켰다. 이교도와의 성전(聖戰)를 뜻하는 지하드와 사하다트(이슬람을 위한 거룩한 죽음) 참여를 선동하고, 탈레반 지도자들에 대한 찬양도 했다. 이는 그의 미공개 자서전 <탈레반 세상에서 나의 인생> 에도 언급된 내용이다. 탈레반>
그가 경찰 감시망에 포착된 건 지난해 2월. 경찰은 당시 중장비를 파키스탄에 밀수출한 사건에 개입한 A씨를 장물처분의뢰 혐의로 붙잡아 조사했다. A씨는 "자금을 빌려줬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 과정에서 A씨의 탈레반 연루 첩보를 입수한 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가 이를 추궁하자 A씨는 "2001년 미군기지를 정탐해 보고한 건 맞지만 현재는 탈레반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가족과 함께 조용히 한국에서 살고 싶다"고 추가적 탈레반 활동을 부인했다.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곧 풀려났다.
경찰이 결정적 단서를 확보한 것은 지난해 5월. A씨의 협박에 시달리던 반대파가 "한국에서 탈레반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해 입국했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탈레반에 서약했다"는 A씨의 발언을 휴대폰으로 녹음해 경찰에 제보한 것이다.
경찰은 이어 다수의 파키스탄인을 통해 "A씨가 탈레반 조직 구축 의도를 가지고 추종 세력에게 스파이 활동을 시키고 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경찰 관계자는 "파키스탄 탈레반에서 중간급 간부 이상의 지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A씨는 오래 전부터 미 중앙정보국(CIA) 리스트에 올라 있어 국정원이 예의주시해온 걸로 안다"고 전했다. 현재 A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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