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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4> 우리의 피신을 도우러 모든 가족을 동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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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34> 우리의 피신을 도우러 모든 가족을 동원하다

입력
2010.02.2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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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한 곳에서 오래 피신생활을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주위 사람이 모르게 드나들려고 해도 오래 살다 보면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설사 우리가 그 집에 사는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보이더라도 우리 스스로 걱정이 돼서 한 집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원열 씨 집에서 큰 딸 하원이를 낳는 등 아주 잘 지냈으나 6개월이 넘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김한림 어머니께 이런 사정을 말씀 드렸더니 며칠 후 약국을 하는 사람 집에 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날 밤 10시경 우리 세 식구는 작은 짐 보따리 두어 개를 들고 택시로 약국을 하는 김상희라는 사람의 당산동 시범아파트로 갔다. 그런데 아파트 입구에 이르러 택시에서 내리려 할 때 택시 기사가 느닷없이 '혹시 장기표 씨 아닙니까' 하는 것 아닌가? 너무 놀랐다. 밤이라 얼굴을 볼 수는 없었겠고, 택시 안에서 주고받은 몇 마디 말을 듣고서 나인 줄을 안 것 같았다. '아뇨,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 기사는 머쓱해져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 택시 기사가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을까 뒷날 생각해보니, 아마 1971년도 내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옆방이 업과상(업무상과실치상. 주로 운전기사들이 피의자다.) 방이라 그때 내 음성을 들은 게 기억에 남아 나를 알아보게 된 것 같았다. 나의 경우 음성만 듣고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아무튼 우리는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었다. 그 택시 기사가 신고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러나 신고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고, 설사 신고하지 않더라도 이날 밤 있었던 일을 주위 사람에게 말하게 되는 경우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늦은 밤이라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그 집에 가서 자기로 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친구 집으로 갔다.

다음날 김한림 어머니께 전날 밤 있었던 일을 말했더니 임시로 있을 집을 구하겠다며 KBS에서 일하는 유영순씨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둔촌동에 있는 조그마한 아파트였는데, 우리로서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했다. 유영순 씨도 천사 같았지만 그 부모님과 형제들도 순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밤의 택시소동으로 김상희씨의 당산동 집에 우리가 갈 수 없게 되자 김상희씨는 우리를 위해 새로 전셋집을 얻는다고 했다. 집만 옮긴 게 아니라 약국도 옮겼다. 그래서 3~4개월이 지나 우리는 목동에서 김상희씨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됐다.

이처럼 우리의 피신을 돕기 위해 그토록 많이 애쓴 김상희 씨는 어떤 사람인지를 간단히 밝혀두고자 한다. 그는 이화여대 약대를 나와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래 '이화여대 여성파워'의 일원으로 지속적으로 사회활동을 해 온 타고난 여성운동가였다.

그리고 지금은 전국구 출신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서 훌륭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한 이목훈 교수와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그런데 김상희씨 부부는 김씨 부모님과 남동생, 여동생도 함께 살았다. 그러니 그 집에는 어른만 김씨 부모님을 포함해 모두 8명이었다. 엄청난 대가족이었다. 득 볼 일은 손톱만큼도 없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담스럽기만 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렇게까지 한 그의 정성은 인간의 심성을 초월할 정도였다.

2년여 동안 목동, 신정동, 안양 등지를 전전하며 김상희 씨 형제들에게 온갖 어려움을 안겨주었는데도 한 번도 다툰 일이 없는 것은 물론 '저 사람들 어디 다른 곳으로 안 가나'라든가, '저 사람들 정말 염치가 없다'든가 하는 인상을 우리에게 준 일이 없었다.

우리가 이처럼 피신할 곳을 새로 구하지 않고도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건 기본적으로 김상희 씨의 민주화열정과 변함없는 마음씨 덕분이겠으나, 이에 못지않게 그의 남편 이목훈 교수의 크나큰 포용력 덕분이기도 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을 언짢아했던들 우리가 어떻게 그토록 오래 함께 살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김상희 씨 집에 있으면서 가장 흉허물 없이 지내고 또 친어머니처럼 대해준 분은 김상희 씨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팔방미인에다 여장부였다. 못하는 일이 없었고 배짱 또한 두둑했다.

우선 그 많은 식구가 먹을 음식을 후딱 해냈다. 대가족의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도 우리 아이들이 바람을 쐴 수 있도록 온갖 곳을 데리고 다닐 만큼 여유 있는 분이었다. 어머니가 끓인 닭죽을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던지!

그런데 어머니는 젊은 시절 공주 출신 박찬 의원의 선거유세장에 열심히 쫓아다녔다고 한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유세를 듣기 위해 대전 공설諍오恙?갔다가 연설도중 빠져나올 수 없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싼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어머니는 그토록 정치에 열광적이었을까? 어머니 자신의 타고난 정치적 감각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학교 공부를 어느 정도 하고 정치할 기회를 가졌다면 대한민국 제1의 정치인이 되었을 게 틀림없다. 김상희 의원이 비록 초선의원인데도 특출한 활동을 하는 것은 자기 어머니의 타고난 정치적 감각을 이어받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여동생 김상옥은 내가 쓴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에 나오는 '선옥'인데, 그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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