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도 별다른 '소득'이 없는데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노력을 했으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일 텐데 말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공부 소득', 그러니까 공부한 것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확인해보면 기가 막힌다.
배운 것은 많지만 기억하는 것은 별로 없다. 이전 학년에 배운 것을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다시 배우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너무도 현실이 엉망이다.
공부의 근본으로 돌아가 보자. 공부의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기억이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익혀서 개념과 사고력을 기르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이런 공부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있다. 목적 달성에 실패한 공부의 대표 격으로 한자검정을 들 수 있다. 자격증은 벽에 걸려 있지만 애써 공부한 한자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에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한자를 배워서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그저 자격증을 따는 것으로만 만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억 없이 소위 '스펙'만 쌓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순간 남는 것은 소득 없는 공부, 고생뿐이다. 스타 강사의 명강의도 수단이고 목적은 기억이어야 한다. 사전 찾기, 문제풀이, 노트 정리 모두 수단에 불과하며 목적은 분명히 '기억 만들기'여야만 한다.
두뇌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장기기억의 실체가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특정 단백질에 의해 회로가 형성되면서 단기 기억 중 일부가 장기기억으로 전환된다.
공부라는 것은 결국 기억 단백질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기억이나 단기기억으로, 일시적으로 회로를 형성했다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두뇌 신경세포에 단백질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장기기억을 얻기 위한 것이 바로 공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 학부모들은 육안으로 확인할 길이 없는 기억 단백질의 형성이 아니라 진도 경쟁에만 신경이 온통 사로잡혀 있다.
눈에 보이는 것 말고는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이기 때문인지 대한민국 학부모들은 3대 진도 경쟁에 매달리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누가 더 일찍 진도를 시작하는가'(조기교육), '누가 더 빨리 진도를 나가는가'(선행학습), '누가 더 많이 진도를 반복하는가'(사교육 더 시키기)하는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빠른 속도로 남보다 앞서 진도를 나가지만 제대로 남는 기억이 없다면. 정말 많이 반복을 해도 결국 기억 만들기와는 거리가 먼 공부가 되고 만다면 정말 어쩌겠는가 묻고 싶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억 만들기에 실패하는 대표적인 이유를 알아보자.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면 뭔가 학습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때 미국 교육계에 파문을 일으킨 책이 있다. 바로 <숙제의 허상> 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숙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학습 이득이 거의 없다는 결과를 입증했다. 숙제의>
읽기를 제외하고는 숙제라는 일을 통해 학생들은 거의 얻는 게 없다는 주장이다. 숙제라는 결과물을 만들기는 하지만 사실 두뇌를 자극하여 의미 있는 기억을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결국 숙제 검사를 통과하기는 했지만 소득은 없는 헛수고에 다름 아니다. 숙제를 통해 뭔가를 얻겠다는 생각은 희박해지고 그저 빨리 끝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에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시험공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시험 준비에 초점이 모아진다. 공부하는 내용보다는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기억도 희미해진다.
공부의 목적을 분명히 하자. 까먹기 위한 공부는 제발 그만 두자. 너무 늦게 배워서 혹은 남들보다 적게 배워서 성적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까먹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진도 경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공부의 왕도는 바로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면서 하나하나 다져나가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최소한 주말에는 새로운 진도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진도를 기억으로 완성하는 시간을 갖자. 사교육 시장에서는 뒤를 돌아보는 공부는 상품가치가 없기 때문에 소홀히 취급한다. 가장 소중한 공부지만 권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학부모들의 각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조기교육, 선행학습 등 진도를 누가 더 빨리 나가느냐가 마치 경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비상교육공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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