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지역ㆍ주민을 위해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은퇴 후 고향에서 CEO형 군수가 되는 것이 꿈이다. 공직을 거쳐 기업에 근무 중인 한 인사는 퇴직 후 낙향해 군의회 의원이 될 계획을 세웠다. 한 대기업 임원은 서울에서 구청장 직에 도전할 생각이다.
지방정치 부패 부르는 정당공천
이들이 지방 행정ㆍ의정 활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평생 쌓은 경륜을 사장시키고 싶지 않아서다. 정치 경험은 물론 정치판과 한 줌 인연도 없지만 지역ㆍ주민 발전을 위해 봉사하며 인생의 후반부를 의미 있게 보내려는 생각이 강하다. 지방 행정이나 의정을 중앙 정부나 국회의 그것과 비교할 순 없지만 지역 주민과 함께 호흡하며 보람을 느끼고 싶다는 것이 이들의 바람이다. 과연 이들은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지방선거는 지역 주민을 위해 일할 선출직 공무원을 뽑는 일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고리타분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어떤 일꾼을 선택하느냐로 지역 생활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때문에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 공약을 면밀히 따지는 것은 유권자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수준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지방자치제는 1991년 부활 이후 6차례의 선거를 치르며 성인이 됐지만 각종 부작용과 폐단으로 아직도 성장통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지방자치는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풀뿌리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활용하려는 이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활동 공간이다.
그러나 꿈을 향한 길 위에는 난관이 수두룩하다. 무엇보다 선거를 통해 주민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 선거에서 당선되려면 정당 공천이 필수다. 공천을 위한 줄 대기도 쉽지 않지만 공천 과정에서 금품 등 대가가 오간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쇠고랑 찰 각오가 없으면 나서기가 어렵다. 꿈은 첫 단계에서부터 현실에 의해 무참히 짓뭉개지고 만다.
지방의 선량이 되려는 이들은 중앙 정치와 분리된, 또는 대등한 관계의 지방자치를 염두에 두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2006년 정당 공천제가 기초의회까지 확대된 뒤 지방자치는 완전히 중앙 정치에 예속되고 말았다. 정당 공천이라지만 지역 국회의원이 사실상 공천을 좌우하면서 지방의회는 국회의원들의 사조직이 됐다. 재선이 절실한 지방의원들은 지역 주민은 제쳐놓은 채 공천 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국회의원 눈치만 살핀다. 국회의원 입장에서도 지역구 관리를 위해 이들이 필요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특정 정당의 간판만 내걸면 당선이 보장되는 지역주의 구도에서 이런 현상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가 단단한 카르텔을 형성한 상황에서 주민 자치, 생활 자치라는 지방자치의 가치는 끼어들 틈이 없다. 출향민을 포함해 경륜과 역량을 갖추고 지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외부 인사들이 수혈될 수 있는 여지도 적다.
지방선거는 번번이 집권 세력에 대한 평가를 두고 벌이는 정당들의 대리전이 돼 버리고, 유권자들은 후보의 면면과 공약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습관처럼 정당만 보고 표를 던진다. 정치적 이해로 중앙 정치와 손잡은 지방 정치의 부패는 자연스럽다. 지방의회는 지역 토착ㆍ이익세력을 대변하는 데 급급하고, 지역 주민의 비난과 개탄에도 아랑곳없이 호화판 외유와 의정활동비 인상에 골몰하고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 몫이다.
주민위해 일할 사람에 길 터줘야
성년 지방자치가 성숙하려면 능력 있고 참신한 인물들이 제약 없이 지역 주민의 선택을 받아 일할 수 있도록 기초의회부터 정당 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 정당 정치의 발전, 집행기관에 대한 감시 등을 위해 정당 공천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지금과 같은 지역주의 구도에서는 기존 정치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제는 진정으로 지역과 주민을 위해 일하려는 이들에게 기회가 돌아가야 한다. 지역주의라는 낡은 보호막 아래에서 혈세만 축내며 입신영달에 몰두하는 이들이 더는 없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지방이 살고 자치가 산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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