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면 난감한 질문들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미혼 남녀들에겐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냐?", 취업 준비생에게는"일자린 알아보고 있는 거냐?", 수험생에겐 "공부는 잘 되냐? 대학은 어디 갈 건데?", 신혼부부한테 "애는 언제 낳을 거니?"라고 묻는다.
상대에 따라, 질문 내용은 정해져 있다. 취업 준비생에게 애는 언제 낳냐고 묻진 않는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은 당사자들의 급소를 건드린다. 본인들도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을 귀신같이 짚어내 건드려준다.
일가붙이 관심의 표현
집어 먹던 떡이 목에 탁 걸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장판 무늬를 살피게 된다. 청문회에 불려 나온 심정이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던져대는 상대가 원망스럽다. 무슨 억하심정인가. 일부러 골탕 먹이려 먼 길을 찾아왔나 싶다.
게다가 이런 질문들은 단계별로 이어진다. 한 고비 넘겼다 싶으면 다음 질문이 기다린다. 취직하면 결혼은 언제 하냐고, 결혼하면 애는 언제쯤 낳을 거냐고, 하나를 낳으면 둘째는 언제 낳을 거냐고 묻는다. 인생이 무슨 미션도 아닌데, 스테이지마다 질문을 해댄다.
묵언 수행으로 일관하는데도 지쳤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왜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우리 부부가 애 만드는 거랑 작은아버님이 무슨 상관이세요?"라고 분기탱천하거나, "저, 안 그래도 너무 힘들어요."라며 눈물이라도 뚝뚝 흘려보라. 분위기는 급속 냉각된다.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친척들 사이에 '걔, 좀 이상해졌다'는 악소문이 괴질처럼 번진다.
도대체 친척들은 왜 그런 질문들을 해대는 걸까?
오랜만에 만나서다. 서먹하니 그렇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들은 당신이 어떤 상태인지 안다.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다, 애인이 유학 갔다, 연극영화과에 가려는데 점수가 모자란다, 아이는 내년쯤 가질 예정이다. 아니까 굳이 묻지 않는다.
하지만 먼 친척들은 명절 때나 만난다. 당신이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른다. 둘러앉아 있지만 서먹서먹하다. 돌멩이들도 아닌데, 입 다물고 얼굴만 말똥말똥 볼 순 없다. 무슨 말이든 나누긴 나눠야 하는데, 그렇다고 회화 교재에나 나올 법한 "잘 지내셨나요?" "물론요, 당신은?"이라고 할 순 없다. 분란을 일으킬 만한 종교, 정치 얘기도 피해야 한다. 일가붙이니 관심이 있다는 것도 보여줘야 한다. 관심을 보이되 무난한 질문을 찾다 보니, 상황에 맞는 상식적인 질문부터 꺼내게 된다. '졸업을 앞뒀다면 취업, 고3 에게는 진학, 미혼 남녀에게는 결혼, 신혼부부에게는 아이', 이런 매뉴얼대로 질문한다.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벼르고 별러서 던진 질문도 아니다. 서먹서먹하니까 말 좀 붙여 보는 거다.
이런 질문들에 당황하거나 상처받지 말자. 딱히 '나'를 겨냥한 질문이 아니다. 이 단계에 속한 모두에게 두루 던질 법한 질문이다. 진지한 답변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원대한 포부나 세부적인 계획을 듣자는 게 아니다. 그저 말문 트자고 꺼낸 상식적인 질문이니 상식적으로 답하는 것도 괜찮다.
시인처럼 미소로 답하기
"열심히 공부하는 중입니다", "아직 인연을 못 만났네요.", 아니면 아예 적극적으로 "주변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라고 홍보에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게요, 저도 고민 중이에요."식으로 눙치는 방법도 있다.
친척들이니까 말 거는 거고, 물어주는 거다. 서로들 좀 아는 사이니까. 살다 보면 간간이 만나는 사람들이다. 그저 미소로 답하는 건 어떨까. 남들이 "왜 사냐고 물으면", "웃지요"라고 시인이 답했듯.
김나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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