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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2> 금성대군과 이보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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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22> 금성대군과 이보흠

입력
2010.02.15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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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년(세조 3) 6월 27일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제2차 단종복위 음모가 발각되었다. 금성대군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다가 1456년(세조 2) 6월에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삭령-광주-순흥으로 이배되었다. 그런데 금성대군이 순흥으로 이배되기 전에 단종에게 동정적인 집현전 출신 이보흠이 이미 그곳의 부사로 부임해 있었다.

금성대군을 감독할 위치에 있는 부사가 오히려 한 통속이었던 셈이다. 세조 측근들이 이들의 공모를 조장한 뒤 일망타진하려는 작전을 미리 짜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금성대군은 이보흠을 설득해 순흥의 사대부들과 이민(吏民)들의 지지를 받아 영주를 접수하고 안동으로 진출해 자신의 가동(家僮)을 중심으로 2,000~3,000 명의 군사를 동원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영남 일대에 격문을 돌려 지지자들을 규합해 서울로 진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순흥부의 급창(及唱)으로 있던 관노(官奴)가 금성대군의 여자 종과 사귀어 격문(檄文)을 훔쳐 서울로 가서 고발하려 했다. 그런데 이를 눈치 챈 풍기군수가 쫓아가 그 격문을 빼앗아 먼저 고발해 공로를 세웠다. 이로 미루어 금성대군은 세조측 수령들과 집안의 노비들에게 안팎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 측근들은 결정적인 증거인 격문을 확보하자마자 관련자들을 일망타진한 것이다.

사건이 발각되자 세조는 소윤 윤자(尹慈)를 순흥에, 우보덕 김지경(金之慶)을 예천에, 진무 권감(權瑊)을 안동에 보내 관련자들을 심문했다. 죄인 심문은 몇 달 동안 계속되었고, 주동자 21인을 비롯해 300 여명에 가까운 영남 사민(士民)들이 처단되었다. 그리하여 피살자들의 피가 죽계(竹溪) 하류까지 흘러 '피끝'이라는 지명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 해 10월 21일에 금성대군은 안동에서 사사되고, 이보흠은 평안도 박천에 유배되었다가 10월 27일에 교살되었다. 관찬 기록은 이러한 사실들을 은폐 축소했고, 민간인들은 후환이 두려워 이 참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한편 순흥부는 1457년 6월 22일에 군으로, 8월 2일에 폐지되었다가 숙종 조에 가서야 복원되었고, 순흥부 이속(吏屬)들은 강원도 잔역리(殘驛吏)로 강등되었으며, 상왕인 노산군은 죽임을 당했다. 노산군은 처음에 금성대군 집으로 옮겼다가, 금성대군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인 1457(세조 3) 3-4월 경에 영월의 청령포로 귀양가 그 해 10월 21일에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야사에는 자살했다는 설이 있기는 하다.

이와 같이 금성대군 사건은 노산군을 사사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아울러 그를 지지하는 경상북도 일대의 사대부세력이 괴멸되는 처참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세조집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세조의 후계 왕들이 이들을 신원해 줄 수 없어 숙종 조에 가서야 노산군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겨우 풀려나게 된 것이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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