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러 무너지면 세계경제 치명상… 美 '재정 시한폭탄'에 초긴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의회에 제출한 2011년 예산안에서 향후 10년간 해외 군사작전비를 7,280억달러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재정악화를 막기 위해 미국의 자존심인 군사력까지 손댄 셈. 오바마는 이에 더해 국방비를 제외한 행정부의 재량적 지출 또한 3년간 동결하고 각종 증세안까지 동원하겠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하다. 야당은 "증세안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섰고 학계는 "이 정도로는 재정건전화가 요원하다"는 분위기다.
적어도 경제에 있어 미국의 위기는 곧 세계의 위기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1을 차지하고, 글로벌 기축통화를 가진 제국이 흔들리는 순간, 세계 경제는 동반 추락을 면할 수 없는 구조다.
'쌍둥이 적자'(경상+재정적자)라는 낯익은 표현처럼 미국의 재정적자는 늘 세계 경제의 골칫거리였지만, 앞으로 닥칠 미국의 재정위기는 세계경제를 단숨에 집어삼킬 시한폭탄처럼 여겨지고 있다.
사실 지금 미국의 재정상태는 빚을 내 무기를 만들던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상태다. 지난해 GDP대비 재정적자 비율(9.8%)과 정부부채 비율(90.4%)은 1940년대 이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1년 전보다 세입은 16.6% 줄어든 반면, 세출은 18.2%나 늘어난 결과다.
문제는 재정적자가 앞으로 더 심각해 진다는 것. 백악관 예산국(OMB)은 "올 재정적자가 당초 예상보다 540억달러 늘어난 1조5,560억달러에 이를 것"이라며 "2009~2011년 3년 연속 1조 달러를 넘는 것은 물론, 2020년까지도 평균 GDP대비 비중이 4.5%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 조차 너무 낙관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처럼 악화된 재정은 미국경제에 진한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정부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막대한 국채를 발행해야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금리를 끌어올려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 역시 마찬가지. 현재 미국 국채 대부분은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대부분 해외에서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이들 나라들이 미국의 재정적자를 메워주고 있는 셈. 하지만 미국의 경제적 위상하락으로 달러의 매력이 떨어지면서, 각 국은 미국국채 보유를 점차 줄이는 추세다.
그리고 만약 국채를 본격적으로 내던지기 시작한다면, 미국재정은 더 구멍이 나고 달러가치는 추락하면서 더 이상 '달러=기축통화'의 위상은 지속하기 어렵게 된다. 국제금융센터 김종만 수석연구원은 "최근 미국이 중국과의 환율 문제를 부각시키는 이면에는 수출 확대를 통한 세수 증가로 재정건전화를 노리는 한편 달러화 지위를 지키려는 의도도 담겨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재정적자에 관한 한 해법은 하나뿐이라고 한다. 더 걷거나 덜 쓰는 것. 미국도 마찬가지다. 오바마 대통령도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동원하려 하고 있다. 부유층에 대한 증세, 그리고 국방비를 포함한 정부지출의 감축이다.
하지만 단순히 부자증세로만 세수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전반적으로 세입이 늘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를 위해선 경기가 살아나야 하고, 경기를 살리려면 다시 재정을 통해 경기를 부양해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최동순 연구원은 "미국 재정의 현주소는 정부지출로 민간수요를 회복시켜 성장력을 높이는 한편, 세수 증대와 금리 안정으로 재정 건전성을 개선시키고 해외 자본에의 의존도도 낮추어야 하는, 서로 상충되는 과제를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난감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재정정책에 관한 철학 자체가 다른 민주당과 공화당의 영원한 간극, 그리고 행정부가 이런 의회를 설득하기 힘든 정치구조도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배리 아이켄그린 UC버클리대 교수 인터뷰 "한국 재정건전화 시도 좋지만 천천히 해라"
"현재 오바마 정부가 내놓은 재정건전화 방안으로는 부족합니다. 훨씬 강력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배리 아이켄그린(사진) 미국 UC버클리대 교수는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보다 강도높은 재정개혁필요성을 강조했다. 국제경제ㆍ금융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그는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최대 불안요인 가운데 하나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텐데.
"일단 2010년에는 재정적자가 경제회복에 약이 될 수 있다. 여전히 불안한 미국 경제에 지원사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1년부터는 심각한 과제가 될 것이다. 미국 정부가 재정건전화에 실패한다면 달러가치는 더욱 떨어질 것이고 금융시장이나 금융환경도 악화될 것이다."
-일각에서는 향후 수년 안에 재정악화로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는 없다."
-백악관이나 미 의회 등에서는 정부의 재정건전화 노력으로 현재 10% 안팎인 미국의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수년 안에 4%대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동의하는가.
"행정부가 제안해 놓은 조치들로는 부족하다. 세입 측면에서 가장 큰 조치는 부시 행정부 시절 유지하던 연소득 25만달러 이상 가구에 대한 감세종료지만 이것만으로 세수를 크게 늘리기는 어렵다. 부가가치세 도입 같은 보다 강력한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지출 측면에서도 재량적 지출을 동결하는 것 만으로는 어림 없다. 메디케어 같은 법정지출을 줄이는 문제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오바마 행정부가 무슨 제안을 내놓든, 민주ㆍ공화당 간 입장차가 큰 의회가 합의해 주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앞으로 세금부담이 늘어날 부유층과 의료보험 혜택이 줄어들 서민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반발도 예상된다.
"재정문제에 대한 행정부의 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재량적 지출을 동결하고 의회 재정위원회 설치를 제안하는 수준으로는 부족하다. 의회에서는 공화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의사방해자 역할에 머무르지 말고 지금보다 더 행동에 나서야 한다. 행정부의 낭비와 비대 부문을 더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한국도 재정적자 수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한국 정부에 권고를 한다면.
"재정건전화 시도는 좋지만 급하게 하기 보다는 천천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세계 경제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취약한 상태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美 재정적자의 역사
미국 재정이 나쁘다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쌍둥이 적자'란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듯이, 경상수지적자와 함께 재정수지적자는 미국 경제의 오랜 고질병이었다.
역사상 미국의 재정 건전성이 가장 나빴던 시기는 2차 대전 때다. 막대한 전쟁비용 지출로 GDP 대비 재정적자는 1943년 30.3%까지, 국가부채는 1946년 121.7%까지 증가했다.
전후 균형 재정이 회복됐지만, 61~74년 사이 의료보장 제도(메디케어 등) 실시와 베트남전 등으로 재정적자 폭은 다시 늘어났다. 그래도 이 시기 연평균 재정적자 비중은 GDP 대비 1%로 비교적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80년대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국방비 증액과 대대적 감세가 병행됨에 따라 재정적자는 다시 급증했고, 이는 걸프전이 발발한 아버지 부시 행정부까지 이어졌다. 이 당시 재정적자는 GDP 대비 연평균 3.7% 정도로 악화됐다.
미국 재정을 흑자로 돌려놓은 것은 빌 클린턴 대통령. 90년대 경제가 워낙 좋아 세수가 늘어난데다, 과감한 재정감축정책까지 단행함에 따라 98년 미국 재정수지는 마침내 흑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2001년 출범한 조지 W 부시(아들) 행정부는 공화당 강령대로 대규모 감세조치를 실시한 데다 9ㆍ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ㆍ이라크전에 막대한 국방비를 투입함으로써, 재정적자는 다시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어 집권 마지막 해인 2008년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 따른 금융위기로, 천문학적 구제금융을 투입하면서 재정수지가 급속히 나빠졌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역시 금융위기와 경제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펴는 바람에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재정 악화를 맞고 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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