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들을 방석 대신으로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마광수(59) 연세대 교수의 시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는 그 내용대로 영화 '바람과 라이온'을 보면서 착상한 작품이다. 1977년 어느 날 숀 코너리 주연의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던 그는 "20세기 초 모로코 왕이 노예들을 방석, 의자 대신 깔고 앉는 장면에 영감을 받았다"며 "내 마음 속에 꿈틀대는 권력욕, 한편으론 그것을 거부하는 이상한 양가감정을 시로 형상화시켰다"고 적었다.
최근 발간된 계간 '시인세계' 봄호는 마 교수를 비롯한 시인 16명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고 시를 쓴 경험을 밝힌 글을 실은 '내 시 속에 들어온 영화' 특집을 마련했다. 이 잡지 편집위원인 김종해 시인은 "영화는 이미지의 충돌 즉 몽타주를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시 역시 은유, 도치, 생략 등 몽타주 기법을 잘 활용해온 장르"라며 "시와 다른 예술양식 간의 활발한 상호텍스트성을 실감있게 밝히고자 이번 특집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정끝별(46) 시인의 '안개 속 풍경'은 30대 초반 때 그리스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플로스가 만든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보며 영감을 받아 쓴 시다. '깜깜한 식솔들을 이 가지 저 가지에 달고/ 아버진 이 안개 속을 어떻게 건너셨어요?'로 시작되는 이 시에 대해 정씨는 "서로 손을 잡고 안개 속으로 들어서는 영화 속 어린 남매를 보며 여섯 남매를 이끌고 안개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고 썼다.
이병률(43) 시인의 '화양연화' 역시 동명의 영화에 담긴 "위험하면서도 찬란하고, 눈부시면서도 결국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인연"을, 당시 이씨 자신이 겪은 절박한 상황에 대입해 쓴 시다.
김신용(65) 시인은 바위에 기대 자라면서 표면이 돌과 흡사해지는 나무인 '송악'을 소재로 시를 쓰려고 고민하던 중에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고 그 돌파구를 찾았다고 한다. 규율과 속박에 얽매여 돌처럼 굳은 교도소에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영감의 원천이었다. "돌에 기대 표면은 돌의 빛깔로 돌처럼 굳어 있지만 그 속을 흐르는 살아있는 나무의 부드러운 섬유질을 상상해보라!" 이런 착상이 송악의 줄기를 쪼는 새를 형상화하는 시 '바위의 첼로'를 낳았다.
손택수(40) 시인은 김희진 감독의 독립영화 '범일동 블루스'의 제목에서 강한 흡인력을 느껴, 같은 제목의 4연으로 이뤄진 산문시를 썼다. "언젠가는 감독과 직접 만나 술잔을 부딪치기도 했지만, 어찌된 영문이지 나는 아직도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 손씨의 말이다. 권혁웅(43) 시인 역시 홍상수 감독의 영화보다는 영화 포스터가 자신의 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모티프가 됐다고 밝혔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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