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경1249조원 '천문학적 나랏빚'… 코너 몰리는 경제거인 일본
일본의 경제평론가 다카라베 세이치(財部誠一)가 운영하는 웹사이트(http://www.takarabe-hrj.co.jp)에는 '빚시계(借金時計)'가 돌고 있다. 일본의 나랏빚을 표시해주는 시계다. 이 빚시계는 지금도 초당 120만엔(한화 약 1,561만원)의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
지난해 9월 일본 재무성이 발표한 국가채무는 864조 5,226억엔(한화 약 1경 1,249조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는 18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단연 1위다. 올해는 국가부채가 900조엔을 돌파해, GDP의 200% 즉 경제규모의 2배에 달하는 빚을 지게 될 전망이다. 일본 전체가 아무 것도 안 쓰고 2년간 번 돈을 꼬박 모아야 겨우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얘기다.
도요타의 리콜이나 일본항공(JAL)의 법정관리처럼 요즘 일본경제가 무너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지만, 사실 재정위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금융위기 이후 유독 일본만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진 것도 결국은 재정문제로 귀결된다.
시장에선 이미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국제신용평가기관인 스탠다드앤드푸어스(S&P)는 일본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여차하면 실제 등급을 내리겠다는 뜻. 피치 역시 "일본이 국채를 대량 발행하면 국가신용등급을 재검토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직접적 원인은 '잃어버린 10년'에 있다. 1990년대 부동산 버블 붕괴로 장기불황의 늪에 빠지자 일본 정부는 2000년까지 무려 9차례의 경기부양책을 통해 124조엔의 재정을 쏟아 부었다. 물론 재원은 대부분 빚(국채)이었다. 이어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일본 정부는 결국 2011년으로 목표했던 재정흑자 달성시기를 10년 후로 미룬 채, 또다시 재정출혈을 감수했다.
하지만 재정지출이 이렇게 늘어나는데도 세수는 제자리, 아니 오히려 뒷걸음질이다. 올해 일본의 조세수입은 26년만에 최저인 37조 4,000억엔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신규 국채 발행액(44조엔)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나라살림을 꾸리는 데 자기 돈(세수)보다 빚(국채)에 더 의존한다는 얘기다. 가정이나 기업이라면 이미 쓰러져도 몇 번은 쓰러졌을 상황이다.
세수부진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된 국가이다 보니, 세금 낼 사람이 줄어드는 것. 게다가 고령화로 인한 사회보장지출이 늘어나 재정적자는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다.
이대로가면 일본은 빚조차 내기 힘든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가계가 국채를 직접 매입하거나 금융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들였으나, 저축률이 떨어지면서 국채소화 능력에도 한계가 온 것. 일각에서는 가계가 국채를 감당할 수 있는 기간이 10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현재의 세입-세출 구조를 유지하는 한, 어떤 경우라도 빚은 늘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재정적자 대부분이 (고령화 같은) 구조적 요인 때문에 발생하고 있어 경제가 회복되어도 적자를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유럽연합(EU) 회원국이 재정적자를 GDP 3% 이내로 의무 관리토록 하는 것처럼 일본도 상한선을 정해 재정수지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도 6월까지 중기 재정대책을 내놓겠다고는 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올지는 미지수다. 당장의 경기부양이 급한 정부로선, 재정건전성보다는 여전히 디플레이션 탈출이 더 관심사인 탓이다. 더구나 7월엔 참의원 선거가 있어, 사회보장정책 축소나 세율인상 같은 개혁안이 나오기도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일본이 재정개혁을 늦추면 늦출수록 또다시 '잃어버린 10년' 아니 '영영 잃어버린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 나카야마 미쓰테루 "복지, 국채발행에 의존해선 안돼"
거시경제 및 예산 분야 전문가인 나카야마 미쓰테루(中山光輝ㆍ사진) 주한일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은 본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일본 경제가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재정건전화는 긴박하고도 중요한 과제"라고 진단했다.
또 "재정 신뢰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재정정책의 경기부양 효과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며 "일본처럼 고령화가 진행 중인 한국이 사회보장제도를 부채에 의존하면 심각한 문제를 겪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일본의 국가부채가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왔다는 우려가 있다.
"현 시점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번 세계 경제위기 이후 채무잔고가 경제대책, 세입감소 등의 이유로 대폭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금기금 등의 자산을 감안한 순채무잔고는 GDP 대비 100% 정도다. 개인 금융자산도 1,400조엔에 달해 국가 단위에서 거시적으로 보면 아직 지속 가능한 상태라고 본다."
-일본은 재정적자를 겪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무역흑자가 많아, 부채 규모에 비해 그 심각성이 덜하다는 낙관적 시각도 있는데.
"국가 단위에서 보면 지속 가능한 상태지만, 개인 금융자산은 그대로 국가채무 상환에 충당할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다. 때문에 세율을 높여 (민간에서 국가로) 자산을 이전하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정치적ㆍ경제적 리스크가 크다. 또한 고령화ㆍ인구 감소 추세 등을 감안할 때, 일본의 재정건전화 조치는 긴요한 과제이다."
-재정으로 경기를 떠받치는 정책이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하나.
"재정건전성이 악화된 상황에서는 장래에 세금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현 시점의 재정지출이나 감세가 소비 증가에 직결되지 않는다는 연구가 있다. 재정의 신뢰도가 재정정책의 효과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일본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을 구사해야 하나.
"고령화나 인구감소 등을 감안해 보수적인 시각에서 중장기적인 재정건전화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일본의 재정구조를 보면 일반 세출에서 사회보장 관련 비용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일시적 지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출되어야 하는 경비이므로 국채 발행에 의존하지 않는 확실한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일본의 경험에 비춰, 한국 재정정책에 조언을 한다면.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전한 재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처럼 급속하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중이기 때문에, 사회보장제도를 부채에 의존해서 설계하면 채무잔고가 급증할 수밖에 없다. 확실한 수지전망을 세워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영창기자
■ 재겅건전화-사회보장 딜레마 깊어가는 열도
일본의 재정건전성 회복 여부는 사회보장비용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일본 재무성 통계에 따르면 2008년 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 일반회계 세출 중 사회보장비용이 26.2%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선진국들도 그렇지만,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일본에서 사회보장비용 증가는 피할 수 없는 현실. 일본 인구는 이미 2005년 1억 2,776만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는데, 이중 의료ㆍ연금ㆍ간병비 수혜 대상인 65세 이상 연령층은 2012년 3,000만명을 넘어선다. 2050년이 되면 노령화는
더 심해져 노동인구(15~64세) 4명이 3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구조가 된다.
이대로라면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 뻔하지만, 민주당 하토야마 정부의 정책기조는 오히려 사회보장 관련 비용을 늘리겠다는 쪽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8월 총선 공약에서 집권기간 동안 국민들에게 각종 수당을 직접 지급하는 방식의 '직접지원책'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은퇴자에게 월 7만엔 이상의 최저연금을 지급하고, 아이들에게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월 2만 6,000엔의 어린이 수당을 주는 식이다.
올해에만 8조엔, 2013년엔 16조7,700억엔이 추가로 들어가는데, 민주당은 ▦인건비 축소 ▦정부자산 매각 ▦조세특례제도 폐지를 통해 재원을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일본의 미즈호연구소가 "이대로라면 5조엔의 재원 부족이 예상된다"고 밝혔을 만큼, 전문가들 사이에선 하토야마정부의 사회보장정책이 원안대로 추진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재정도 건전화하면서 사회복지지출도 늘리는 '두마리 토끼 몰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얘기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