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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 기자, 아이티 구호현장 가다/ "살릴 수 있는데 죽어간다…" 발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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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우 기자, 아이티 구호현장 가다/ "살릴 수 있는데 죽어간다…" 발 동동

입력
2010.02.07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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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라면 살릴 수 있었는데…." 환자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의사는 자책했다. 인술(仁術)의 기회조차 앗아간 현지상황이 야속하기만 하다. 6일(한국시간 7일) 지진발생 23일째를 맞은 아이티는 애꿎은 주검을 늘리고 있다. 살 수 있는데 살릴 수 없는 모순이 아이티에선 일상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 거리에 쓰러진 한 소녀가 5일 한국 의료지원단에 실려왔다. 청진기를 대지 않아도 가슴 속에선 "끄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에 물이 찬 탓이다. 소녀는 눈동자가 돌아가고 다리가 퉁퉁 부어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한국 의료진은 면역력이 떨어진 체내에 침투한 균이 온몸으로 퍼진 패혈증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선 최소한 피검사라도 해야 하는데 장비가 없었다.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하고 1시간30분 거리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소녀는 구급차 안에서 숨졌다. 김현실 외과전문의는 "적절한 치료만 받았어도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숨지었다.

# 6일 아이티의 한국 의료지원단 진료실은 오후 내내 침울했다. 또 다른 소녀의 안타까운 부고(訃告)를 접했기 때문이다. 데스턴 크리스틸리(16)는 전날 오후 씩씩하게 제 발로 병원에 왔다. 다만 불룩 나온 오른쪽 배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복강 내 종양을 의심했지만 마취과 의사의 부재로 수술을 할 수 없어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소녀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음의 문턱에 들어섰다. 노준승 가정의학과전문의는 "나이도 어리고 식사도 잘하는 등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로 아픈 건 아니라 상식 수준에선 사망할 이유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인 양 슬퍼했다.

어느 의사가 자신을 찾아온 환자를 돌려 보낼까. 하물며 먼 타국에서 인술을 펴기 위해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한국의 의료진에게 현지환자를 돌보는 일은 무엇보다 값지다. 그런데 속절없이 다른 병원으로 보내거나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진단장비와 요양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적십자사, 가톨릭중앙의료원이 더불어 꾸린 의료지원단 1진(15명)이 진료소를 마련한 곳은 델라빠스(평화)병원이다. 아이티에서 두 번째로 큰 병원이지만 지진이 난 뒤 전기가 끊겼고, 현지의사들은 달아났다. 수술은커녕 기본적인 검사도 할 수 없다.

우리나라 의료진만 악전고투하고 있는 건 아니다. 대다수 병원이 무너지면서 병원 자체가 없고 설사 병원에 간다 해도 적절한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없다. 이로 인한 사망이 늘어갈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쿠바 각국NGO 등 해외 의료지원단이 가까스로 아이티의 의료 공백을 메우고 있지만 아이티정부의 의료지원은 전무한 실정이다. 무정부 상태에 가깝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아이티가 지진참사 이후 '제2의 재난'에 직면해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제적십자연맹은 아이티에 전염병이 창궐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부족한 식수, 열악한 위생 및 영양상태 등은 언제든 상황을 악화시켜 지진에 버금가는 고통을 안길 차비를 하고 있다.

실제 주민들은 대통령궁 부근의 분수대에 고인 오물로 몸을 씻고 있다. 거리에선 어디서 떠온 것인지도 모를 물을 작은 비닐봉지에 담아 팔고 있다. 아이티엔 현재 정수시설이 없다. 돈이 없는 이재민들은 이마저도 마시지 못한다.

6일 오전 한국 의료진은 아이티국제공항 부근 라페스타란 지역에서 열병 파상풍 풍진 등의 응급예방접종을 1,100여명에게 실시했다. 국제적십자연맹 등은 앞으로 2주간 50만명을 대상으로 예방접종을 할 예정이다.

김성근(가톨릭중앙의료원) 의료지원단장은 "곧 우기(雨期)가 오면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질 수 있어 지금부터라도 철저한 예방접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아이티 권력의 핵심부인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대통령궁 주변엔 이재민촌이 있다. 1,000여개의 천막이 궁을 둘러싼 형국인데 이재민촌 중엔 최대 규모다. 그러나 지진으로 무너진 대통령궁엔 현재 아무도 없다.

현지인들은 오히려 궁 한쪽에 세워진 동상에 뭔가를 바라는 눈치다. 1804년 아이티를 프랑스로부터 독립시킨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장 자크 데살린의 기념비다. 아이티(원주민이란 뜻)라는 국명도 그가 지었다. 동상은 말을 타고 궁을 바라보고 있다. 피난민들은 자유를 안겨준 영웅의 동상 주변에 말없이 모여든다.

어쩌면 주민들은 그들에게 현재 절실한 그 무엇을 가져다 줄 제2의 데살린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한국 의료진은 7일부터 현지의 남아있는 병원을 돌며 응급구호체계를 살핀다. 끊기고 무너진 의료시스템을 살펴 정작 필요한 게 뭔지 보고서로 만들어 구호활동에 활용할 참이다. 살 수 있는데, 죽어가는 이들을 막기 위해.

포르토프랭스(아이티)=글·사진 김현우 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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