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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중년의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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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의 길 위의 이야기] 중년의 로망

입력
2010.02.07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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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잠시 악대부에서 트롬본을 불었다. 등교하는데 비가 내렸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악대부 연습실 앞을 지나가는데 3학년 선배가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어제는 비가 내렸네 키 작은 나뭇잎 새로 맑은 이슬 떨어지는데…' 그 때 내 영혼을 건반처럼 짚고 간 노래는 윤형주의 '어제 내린 비'였다. 그 길로 악대부에 가입했다. 나에게 맡겨진 악기는 트롬본이었다.

결국 '등대지기' 한 곡을 더듬더듬 연주할 때쯤 악대부를 나왔다. 청마 유치환 시인이 교장으로 계셨던 부산의 여학교에 초청 강연을 갔다가 교장 선생님 명함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색소폰을 들고 찍은 프로필 사진이 들어있었다. 학교라는 동네도 그렇고, 더구나 교장이란 자리가 얼마나 보수적인 의자인가. 그 틀을 확 깨는 듯한 명함을 받고 유쾌했다. 젊어서 기타를 쳤다는 교장 선생님은 나이가 들면서 다시 색소폰을 배워 가끔 여학생들 앞에서 멋진 연주를 한다고 했다.

최근 남편이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한 시인은 실력이 늘면 노을 지는 저녁 강가에서 자신을 위해 로맨틱한 연주를 하는 것이 남편의 꿈이라고 한다. 요즘 색소폰 연주가 중년 남자의 '로망'이라고 말한다. 고백하자면, 사실 악대부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내가 음치, 박치였기 때문에 쫓겨났다. 나의 중년은 연주할 줄 아는 악기 하나 없이, 로망도 없이 지나가고 있다.

시인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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