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위기로 '거덜난 곳간'서 공공부문·복지 비용 퍼내기만
지난해 10월21일 그리스 정부는 유럽연합(EU) 통계당국인 유로스타트에 재정적자 수정전망치를 보고했다.
2009년 말 재정적자가 6개월 전 보고했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3.7%가 아니라 무려 12.7%에 이를 것이고, 국가부채는 GDP의 112.6%에 이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EU 국가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스의 부도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가파르게 치솟았다. 그리스는 동유럽을 제치고 '유럽의 문제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위기는 '유사한 처지'에 놓인 국가들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아일랜드까지.
재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국가들의 이니셜을 딴 'PIGS'는, '유럽의 돼지들'이란 부정적 뉘앙스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가장 위험한 뇌관으로 주목 받게 됐다.(원래 PIGS에서 I는 이탈리아를 뜻하지만 일부에선 아일랜드까지 넣어 'PIIGS'로 부르기도 한다)
높은 복지지출로 인해 유럽국가들의 재정구조가 취약한 것은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실시한 것이 결국은 도화선이 됐다.
유로존 16개국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2008년 69.3%에서 지난해 78.2%로 9%포인트나 뛰어 올랐다. 올해는 무려 84%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위기의 핵이 된 그리스는 오래 전부터 광범위한 탈세와 공공부문 비효율, 만연한 부패 등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스 감사원은 "2007년에 징수되지 않은 세수 규모가 GDP의 13.6%인 310억 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세수 기반이 취약한데도 그리스는 2004년부터 법인세율을 매년 3~4%포인트씩 인하하는 감세 정책을 폈다.
지나친 연금 보상수준과 비대한 공공부문도 문제다. 그리스의 임금 대비 연금 비율은 무려 95.1%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공공부문 종사자 중 25%가 과잉 인력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1995~2008년중 공무원들의 실질임금 상승률은 연평균 3.1%로 유로존 평균(1.25%)과 비교도 되지 않게 높았다.
스페인과 아일랜드는 수 년 전만해도 최상위 국가신용등급을 자랑했지만, 부동산 버블이 꺼진 후 재정이 급속하게 나빠진 케이스다.
스페인의 경우 2007년 버블붕괴와 함께, 건설업이 침체에 빠지면서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세수는 급감했다.
지난해 스페인 정부수입은 전년보다 13.9%나 줄었다. 반면 실업률이 20% 가까이 치솟으면서 실업수당 지급이 늘어났고, 경기부양지출까지 겹쳐 재정적자가 GDP의 11%까지 늘어났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천문학적 외자유치로 유럽 내에서 가장 잘 나갔던 아일랜드 또한 2007년 버블 붕괴로 정부세입이 평소의 3분의2까지 줄었고, 가장 급팽창했던 금융부문이 '리만'사태의 직격탄을 맞아 대량의 공적 자금이 투입되면서 재정은 더욱 악화하고 말았다. 한때는 '셀틱 타이거'로 불렸지만, 이젠 '종이호랑이'가 된 상태다.
결국 PIGS국가들의 경우 ▦원래부터 재정구조가 튼튼치 못한 상태에서 ▦비효율과 버블이 뒤엉키면서 상황을 악화시켰고 ▦끝내 금융위기 후폭풍을 넘지 못해 지금의 위기상황을 맞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창선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PIGS국가들은) 경기회복세가 더딘데다 정치불안까지 가세할 경우 정부의 부채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의심이 확산돼 결국은 금융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유럽경제 전문가 페리 "위기 맞지만 국가부도까진 안간다"
"유럽에 재정 문제를 겪는 국가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채무불이행 사태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어디서든 구제를 받게 될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경제ㆍ금융 싱크탱크 '브뤼겔(Bruegel')의 장 피사니-페리 소장은 본지와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세계 경제의 최대 불안 요인으로 떠오른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에 이 같은 견해를 밝혔다.
프랑스 출신의 피사니-페리 소장은 EU 집행위원회 경제자문, 프랑스 총리실 산하 경제분석위원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한 유럽 경제 최고 전문가다.
-마크 파버는 "모든 금융위기 후에는 국가부채 위기가 따른다"고 최근 말했다. 동의하나.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대체로 높은 재정 비용을 치르게 된다. 세수 급감과 구제금융 때문이다. 이번에도 선진국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중은 20~40%포인트나 뛸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해서 꼭 국가부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취약한 국가들은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가 심한 압박을 받고 있고, 포르투갈 스페인도 나쁜 상황이다."
-유로존 국가 중 어떤 국가가 가장 부도 위험이 높은가?
"원칙적으로 국가부도 가능성이란 상존한다. 우리는 몇몇 국가들이 채권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채무상환을 연기나 재조정하는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지원이 이뤄질 것이다. EU 또는 EU 국가들, 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대출할 수도 있다. 물론 모두 특정한 재정 목표를 달성하라든지 하는 조건이 붙겠지만, 어쨌든 실제 디폴트까지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PIIGS라 불리는 국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PIIGS라는 이니셜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라마다 상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지속적으로 재정상황이 나빴고, 두 번이나 잘못된 예산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탈세도 심하고 경제도 경쟁력이 없다.
포르투갈도 경제적으로 약하지만 보고 오류 같은 문제는 없었고 이미 재정개선을 시작했다. 스페인과 아일랜드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재정적으로 강했지만 수년 동안 부동산 버블이 일어났다.
이후 버블이 붕괴되자 세수는 급감했는데 구제해야 할 은행은 (특히 아일랜드에서) 급증했다. 이들 국가의 재정 문제는 결과일 뿐 원인은 아니다."
-유럽에서 부도사태가 실제로 벌어진다면 유로존과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만약 그리스가 부도가 난다고 굳이 가정하자면, 국채 이자가 급상승하고 모든 국가들의 상황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로 지역 전체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 국가들이 현재 재정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을 취하고 있는가?
"유럽은 벌써 재정 쪽에서는 지난해 가을부터 출구전략을 준비했고 늦어도 2011년에는 시작하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도 출구전략이 필요한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 재정개혁 착수했지만… 노조 반발 등 '걸림돌'
유럽국가들의 재정개혁 작업은 이미 시작됐다.
그 방향은 ▦금융위기 수습을 위해 경기부양 지출은 계속하되 ▦연금 지급시기 연장이나 공공부문 비효율화 제거 등을 통해 중장기적 재정 건전성을 확보한다는 것.
독일의 경우, 지난해 6월 중장기 재정적자 상한선을 명시하는 '재정수지 건전화법'을 제정(2011년 발효)했는데, 경기침체시 적자가 나면 호황기에 반드시 보전해 재정균형을 맞추도록 명시돼 있다.
프랑스도 지난해 2월에 '다년도 재정계획법'을 채택, 2009~2012년 사이 정부지출 증가율을 연간 1.1%로 억제토록 했다. 네덜란드도 2011년부터 20여개 분야에 걸쳐 재정지출의 20%를 감축하는 내용의 재정건전화 계획을 지난해 9월 발표했다.
PIGS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아일랜드만해도 지난해부터 적극적 재정지출감축에 돌입, 적자규모를 14% 가량으로 낮췄으며, 올해도 공공부문임금과 실업수당, 자녀 양육비 등 삭감을 통해 11%까지 낮출 예정이다.
때문에 일각에선 "재정건전화 노력으로만 본다면 미국 일본보다 유럽이 훨씬 낫다.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재정위기는 충분히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걸림돌은 있다. 오랫동안 누려왔던 복지혜택 축소에 대한 국민적 저항, 특히 공공부문 및 노조의 반발이다.
포르투갈의 경우 의회가 지난 5일 재정적자 감축을 골자로 하는 정부법안을 부결시키면서, 일부 주 정부의 부채는 더 늘리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국가적 재정적자 감축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위기의 진원지인 그리스에선 정부의 재정적자감축안에 노동계가 반발, 10일 공공부문 총파업이 예고된 상태다. 독일 프랑스 등 국가들도 노조의 반발 속에 파업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재정위기 극복의 열쇠는 정치권과 노조가 쥐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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