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은 떡이 두레 반'이란 옛말이 있다.
자기가 여기저기서 조금씩 얻은 것이 남이 애써서 만든 것보다 많다는 뜻이다. 이 말의 이면엔 우리네 조상들의 떡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바로 나눔의 정(情)이다.
설을 앞두고 '정월 떡 축제'를 벌이고 있는 서울 세종호텔 한식당 은하수를 찾아 조상들의 나눔의 마음을 되새겼다.
"정성이 반"
설 하면 '가래떡'이다. 가늘게 썰어 떡국에 넣어 먹으면 싫어도 나이까지 덤으로 먹어야 했다. 가래떡 말고도 우리 떡은 옛 문헌에 기록된 종류만 해도 200여 가지다. '정월 떡 축제'를 총괄하는 한인선 조리장이 축제현장에서 '개성주악'이라는 떡을 직접 만들어 보였다.
미리 준비해둔 찹쌀반죽을 떼어 동그랑땡만한 크기로 동글동글하게 빚었다. 옆에서 반죽을 조금 떼내 입에 넣어봤다. 처음엔 살짝 쫄깃하다가 어느 정도 씹고 나면 슈크림처럼 입 안에 녹아 드는 느낌. 달콤하고 촉촉했다.
140∼160℃로 가열한 식용유에 빚은 반죽을 떨어뜨려 은근한 불에 지졌다. 기름 양이 많아 지진다기보다는 튀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반죽이 살짝 부풀어오르고 기포가 올라오며 노릇노릇해지기 시작했다.
찹쌀도너츠처럼 색이 변하자 기름에서 건져내 바로 생강을 저며 넣어 알싸한 맛이 감도는 조청을 입혔다. 식으면 조청이 잘 묻지 않는단다. 씨를 빼고 자잘하게 썰어둔 대추조각을 꼭대기에 살포시 얹었다. 드디어 개성주악 완성.
입 안에서 조청이 살며시 눌리는 순간 조청의 생강향이 쫀득쫀득한 찹쌀에 배어들었다. 막걸리 맛은 어디로 숨었는지 잘 헤어나오지 못했다. 개성주악은 황해도 개성 지방에서 정초에 자주 먹었다. 귀한 손님이 왔을 때나 폐백과 이바지 음식에도 쓰였다.
조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것저것 묻는 동안에도 한 조리장의 신경은 온통 반죽과 기름에 쏠려 있다. 경력 20여년의 한식 전문가인 그도 떡만큼은 아직도 쉽지 않단다. 그의 표현을 빌면 "떡은 정성이 반"이다.
기름 속에선 살짝만 닿아도 반죽끼리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어 버린다. 노릇해지기 시작할 때 그냥 두면 한쪽만 샛노래진다. 그래서 지지는 동안 반죽끼리 달라붙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수시로 뒤집어줘야 한다.
찹쌀반죽도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전날 새벽부터 찹쌀을 깨끗이 씻어 충분히 불린 다음 소금을 넣고 가루로 곱게 빻아 밀가루와 설탕을 섞어 체에 내렸다. 막걸리를 미지근하게 데워 뜨거운 물과 함께 넣으며 치대 반죽을 만들어둔 것이다.
반죽을 들었다 놨다 수십 번 하다 보면 팔은 물론이고 온몸이 뻑적지근해진다. 이렇게 공들여 만든 떡을 이웃 친지와 아낌없이 나눈 옛 아낙네들의 마음 씀이 새삼 더 살가워진다.
찹쌀 떡과 멥쌀 떡
떡을 만드는 기본은 찜이다. 쌀가루로 만든 반죽을 찜통이나 시루에 넣고 뜨거운 증기로 익히는 것이다. 이 기본 과정만으로도 수많은 떡이 나온다.
찹쌀반죽을 쪄 만드는 '두텁떡'은 과거 왕의 생일상에 빠지지 않고 올랐을 정도로 귀했던 궁중요리다. 서민들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왕의 떡답게 조리법도 복잡하고 독특하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보통 떡과 달리 두텁떡에는 간장이 들어간다. 연한 갈색이 바로 간장 때문이다. 떡 안의 소에 들어가는 유자청과 계피가루는 특유의 고급스런 향으로 식욕을 돋운다.
썰어놓은 모양과 색깔에 따라 이름이 붙은 '쇠머리떡'과 '구름떡'도 찹쌀반죽으로 쪄낸다. 충청도 지역의 쇠머리떡은 콩이나 밤 같은 고명이 켜켜이 박혀 있어 층층이 결이 있는 쇠머리 편육과 비슷하게 생겼다.
강원도 영동 지방에서 많이 먹었던 구름떡은 단면의 줄무늬와 희고 검은 부분이 어울려 구름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밥을 지을 때 쓰는 멥쌀도 떡 만드는 중요 재료다. 멥쌀반죽을 쪄 만드는 대표적인 떡이 바로 '증편'. 이번 축제엔 강원도 강릉에서 주로 먹었던 방울 모양의 증편이 등장한다.
방울증편은 반죽을 만들 때 막걸리와 물을 1대 2 비율로 넣고 발효시키는 점이 독특하다. 한 입 물면 개성주악보다 막걸리의 존재감이 훨씬 선명하게 느껴진다.
한방에서 설명하는 찹쌀과 멥쌀의 효능은 다르다. 멥쌀은 구토와 설사를 멈추게 하고 허해진 기를 보해준다. 찹쌀은 위가 약하거나 열이 많아 가슴이 답답할 때 먹으면 좋다.
찹쌀과 멥쌀 떡은 입 안에서 달라붙는 느낌도 미묘하게 다르다. 찹쌀 떡은 쫄깃쫄깃하고 끈기가 있는데 비해 멥쌀 떡은 상대적으로 포슬포슬하다. 멥쌀반죽에 물을 좀 많이 넣은 떡은 풀처럼 엉긴다.
찌거나 빻지 않고 삶거나 지져 만드는 떡은 대부분 멥쌀보다는 찹쌀을 쓴다. 경상도 밀양 지방의 '부편'이 바로 찹쌀반죽을 삶아 만드는 떡이다.
안에 넣는 소에는 콩가루와 꿀 계피가루가 들어가고, 겉은 곶감채나 대추채 녹두고물 팥고물 깨고물로 맛을 낸다. 개성주악보다 적은 양의 기름에 지져내는 '화전' 역시 찹쌀반죽으로 만든다.
제주도에선 찹쌀과 멥쌀 말고 차조로도 떡을 해 먹었다. 제주 향토음식으로 유명한 '오메기떡'이다. 차조가루를 반죽해 가운데 구멍이 뚫린 도너츠 모양으로 빚은 다음 끓는 물에 삶아 건져낸다.
물기를 완전히 빼고 콩고물이나 팥고물을 보슬보슬하게 묻힌다. 다른 삶은 떡은 식은 뒤 먹는 게 보통이지만 오메기떡은 뜨거울 때 먹어야 제 맛이다.
어울림의 미학
떡 만드는 재료는 곡식 가루와 소나 고물 몇 가지가 전부다. 그런데도 종류가 이렇듯 다양할 수 있는 이유는 쌀의 고유한 특성 덕분이다.
쌀은 어떤 재료와 섞여도 재료 본래의 맛은 물론 모양이나 색깔까지 그대로 살아나게 한다. 소를 넓게 둘러싸 안고 고물 뒤에 보이지 않게 숨어 이들의 맛과 향을 돋보이게 해준다.
매일 먹어도 싫증나지 않는 매력 역시 떡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다. 세종호텔의 정월 떡 축제는 이달 12일까지 계속된다. (02)3705-9141∼2
임소형 기자 precare@hk.co.kr
류효진 기자 jskn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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