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본디 살아있다. 평면에 갇힌 빼곡한 활자는 독자가 펼치기만 하면 어김없이 살아난다. 필자가 속삭이는 세상과 삶, 이야기와 정보는 독자의 상상 속에서 살을 얻고 호흡을 한다. 풀리지 않는 갈증은 있는 법, 그래서 독자들은 '저자와의 대화'를 일부러 찾곤 한다.
3일 국회도서관은 살아있는 책(Living Book)을 빌려주는 '살아있는 도서관(Living Library)' 행사를 열었다. 국내에선 첫 시도라고 하는데, 언뜻 저자와의 대화를 연상하기 쉽지만 다르다.
살아있는 책은 저자가 아니라 평소 궁금하게 여겼던 사람 그 자체다. 살아있는 도서관은 사람을 대출해주는 셈이다. 쉽게 말해 책을 고르듯 사람을 고르고, 얻고자 하는 정보를 읽는 게 아니라 직접 듣는다는 것이다.
2000년 덴마크 출신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비행청소년을 대상으로 시작했는데, 호응이 좋아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로 퍼져 도서관 이벤트로 많이 열린다고 한다.
목적은 대화와 소통으로 타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을 줄이자는데 있다. 국내에선 어떤 사람들이 살아있는 책으로 뽑혔을까? 모두 43명의 살아있는 책이 대출됐는데, 그 중 인기가 남달랐던 리빙 북 몇 권을 소개한다. 차근차근 책장을 넘겨보자.
'레즈비언의 삶'
홀릭(34)씨는 주로 여성 독자들이 대출했다. 성적소수자의 대표로 나선 그는 28세 때 어머니에게 동성애자라고 밝혔다. 당시 엄마의 반응을 실감나게 전하자 독자들은 긴장했다. 홀릭씨는 "한국성적소수자 문화인권센터에서 일하기 때문에 매번 커밍아웃하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독자들은 목차는 접어두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언제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했어요?" 리빙 북이 차근차근 생각을 풀어내자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홀릭씨는 결론을 내듯 이렇게 말했다. "보통 남자친구 있나, 여자친구 있나 이렇게 묻잖아요. 상대가 이성애자라는 전제가 깔린 질문이죠. 그냥 '애인 있나'라고 물으면 어떨까요?"
'남자간호사의 고민'
4년차 남자간호사 김진효(30ㆍ건국대병원)씨는 주로 후배들이 빌렸다. 지난해 7월 간호사가 된 김정민(26)씨도 독자로서 살아있는 책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의례적으로 간호사는 여자고, 남성은 여성보다 섬세하지 못하다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고정관념 탓에 보호자가 환자를 직접 돌볼 수 없는 수술실 등 특수분야에서만 근무하고 있다는 것.
진효씨는 용기를 줬다. "그럴수록 당당해야죠. 전체 간호사의 1%에 불과하지만 '간호는 소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면 어떨까요. 기회가 올 겁니다." 현실적인 제안도 했다. "삼성서울병원 등 병원 4곳의 남자간호사들이 만든 모임에 참여하면 도움을 받을 겁니다." 책을 읽은 정민씨의 낯이 한결 밝아졌다.
'한국인이 된 일본인'
"왜 일본인인데 귀화했어요?" 문준혁(14ㆍ단대부중2)군의 질문은 당돌했다. 하지만 책으로 나선 호사카 유키 세종대 교수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어릴 적 재일동포를 많이 알았어요. 식민지시대 일본이 했던 일을 연구하기 위해 30년 전쯤 고려대에서 공부하게 된 게 계기고요. 그렇게 이어진 인연이 2003년 한국인으로 거듭나게 된 거죠."
독도문제도 빠지지 않았다. 문군은 이미 '일본학자들이 독도를 조선영토로 표기한 옛 지도를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유키 교수의 저서 '우리역사 독도'를 읽은 뒤였다. "독도 역사는 왜곡된 부분이 많아 객관적 사실을 바라봐야 한다"는 유키 교수의 말에 문군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밖에도 경력 9년차 바텐더, 라디오DJ, 남자 비행기승무원, 새터민, 방송작가, 구호단체 활동가 등 평소 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살아있는 책으로 나섰다.
왕왕 책과 독자가 뒤바뀌기도 했다. 유종필 국회도서관장을 대출한 드림페인터(꿈의 내용을 그림) 박종신씨는 "드림페인터가 뭐냐"는 유 관장의 질문에 책으로 바뀌었다. 호응에 비해 대출시간 20분은 너무 짧았다. 독자들은 "대출시간이 종료됐다"는 안내방송도 아랑곳하지 않고 묻고 또 물었다.
박민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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