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2년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반도체ㆍ컴퓨터사업팀을 조직했다. 국가적인 필요성과 세계 시장 경쟁력을 모두 감안, 당시의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 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 그러나 해외에선 '삼성의 반도체 진출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혹평했고, 국내도 격려보단 우려가 많았다.
#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 136조2,900억원, 영업이익 10조9,200억원의 실적을 올렸다. 이는 전년대비 매출은 15.1%, 영업이익은 91.2% 증가한 것. 매출로만 보면 독일의 지멘스와 미국의 HP까지 추월, 사실상의 세계 최대 전자업체로 등극한 것이기도 하다. 이익으로 봐도 일본 전자업체 10곳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는 게 일본 언론들의 평가이다. 』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호암의 혜안이 새삼 주목되고 있다. 그가 대내ㆍ외 반대를 무릅쓰고 일군 전자산업이 이젠 일본마저 앞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경술국치 해에 태어났던 호암이 100년 후 한ㆍ일 기업 대역전 신화의 씨앗이 된 셈이다. 항상 일본으로부터 배우려고 노력했던 그이지만 이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1840~1931),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1894~1989)마저 뛰어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사실 호암에게 일본은 늘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우물 안세상에서 뛰쳐나온 호암은 진주와 서울을 거쳐 도쿄로 학교를 옮기며 넓고 큰 세상에 충격을 받았다. 그가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귀국한 것도 이런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너무 미약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호암은 좌절대신 도전을 택했다. 오히려 호암은 일본의 기술과 자본, 정보, 인맥 등을 자신의 사업을 일구는 데 적극 활용했다. 사실 그가 가장 먼저 세운 사업체인 마산 협동정미소의 재정적 도움을 준 이는 식산은행의 하라다 지점장이었다. 삼성이 근대적 생산자로서의 면모를 처음 갖추게 된 제일제당 공장을 건설할 때에도 미쓰이물산과 다나카 기계의 견적서를 기본으로 했다.
호암이 항상 신사업 구상을 위해 찾은 곳도 도쿄이다. 1959년 해외 차관 등을 알아보기 위해 일본에 들렀을 때 폭설로 비행기가 못 떠 새해를 도쿄에서 맞게 된 뒤부터 호암은 신년을 늘 도쿄에서 맞았다. 여러 분야 전문가를 만나 그들의 축적된 정보와 의견을 들은 뒤 종합 판단을 한 것. 그 유명한 '도쿄 구상'이다. 가지마 서점과 마루젠 서점은 그가 가장 많이 찾던 정보의 보고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 일본을 따르진 않았다. 배울만한 것만 선택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외중역이란 제도이다. 사외중역이란 정부 및 정치권을 대상으로 한 섭외와 설득을 전담하는 일종의 로비스트. 대부분의 일본 기업들이 채택하고 있는 이 제도에 대해 호암은 "사안이 생기면 전문 지식 등을 갖고 대응을 해야지, 섭외로 해결하려 해선 한계가 있는 법"이라고 거부했다. 맹목적 추종이 아니라 좋은 점만 선별해서 받아들인 점이 호암의 삼성이 이후 일본 기업들을 추월할 수 있게 된 비결이란 해석이 가능한 셈이다.
호암이 '제일대학'이라 불릴 정도로 직원들을 배려하는 최신식 시설의 제일모직 기숙사를 짓게 된 사연도 도쿄 유학시절 읽은 <여공애사> 라는 책이 한 몫 했다. 참담한 여공들 생활을 그린 책을 보며 자신의 공장은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다짐한 것. 여공애사>
이런 관점에서 호암의 업적은 곧잘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와 비견된다. 시부사와는 일본에서 처음 주식회사 제도를 도입, 미즈호은행 도쿄가스 태평양시멘트 도쿄증권거래소 기린맥주 등 500여개의 기업을 세운 인물. 특히 "상업이 부흥해야 나라가 선다"고 강조한 시부사와의 철학은 "기업을 건실하게 발전시켜 국부 형성에 이바지하고 세계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꿈"(1980년 전경련 강의)이라던 호암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경영관도 호암과 유사한 점이 많다. 파나소닉과 내쇼날로 유명한 마쓰시타는 가난하고 허약하고 배운 게 없었지만 이러한 약점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세계적 기업을 일궜다. "좋은 물건을 싸게 많이 만들어 공급함으로써 가난을 몰아내 물질적 풍요를 실현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그의 경영관은 "기술혁신을 이룩하여 보다 좋은 상품을 제일 먼저 내외 시장에 내놓아 고용과 소득의 증대를 가져오고…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 기업인의 본분이고 기업인의 사회적 의무"(1976년 서울경제신문 '재계회고')라고 한 호암과 똑같다.
재계 관계자는 "우리나라에 '사(士)의 역사'는 있었어도 '농공상(農工商)의 역사'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호암은 신라시대 장보고에 이어 우리 역사에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기업가이면서 세계적인 사업가"라고 말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 비서팀장 출신 양인모 고문이 본 호암
"할아버지, 저도 회사 따라가면 안돼요?"
"회사를? 안돼, 할아버지 얼른 갔다 올게."
"싫어요, 저도 같이 갈래요."
"그 녀석 참, 그럼 사무실까지만 같이 갔다 돌아오는 거다, 알았지?"
"네, 할아버지 최고!"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손자들과 아침마다 나누었을 대화를 재현한 것이다. 1968년 삼성그룹 비서팀에 발령받아 72, 73년에는 비서팀장까지 맡은 양인모 삼성엔지니어링 고문(크로아티아 명예 총영사)은 "회장님은 1주일에 3,4차례 서울 장충동 자택에서 을지로 입구의 사무실까지 당시 다섯살이었던 손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의 손을 꼭 잡은 채 차를 타고 출근하곤 했다"고 말했다.
호암이 차 안에서 손주들과 노는 것을 무척 즐거워했다는 것. 사랑스럽기는 다른 손자들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이미경 CJ그룹 E&M 총괄 부회장과 이재현 CJ 회장 등은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이부진 호텔신라ㆍ에버랜드 전무와 이서현 제일모직ㆍ제일기획 전무 등은 너무 어려 아직 바깥 나들이를 하긴 힘들었다. 그러나 양 고문은 "회장님은 서울대를 나온 이미경 부회장과 고대 법대를 나온 이재현 회장을 늘 자랑스러워하셨다"며 "이부진 전무와 이서현 전무도 귀엽고 총명해 사랑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호암은 가족뿐 아니라 직원들에 대해서도 자상한 면모를 보여줬다. 60년대 후반 대구의 제일모직 공장을 순시 차 갔을 때였다. 비서팀이 호텔을 잡으려고 하자 호암은 공장에 임시 침대를 갖다 놓고 자겠다고 했다. 직원들과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멘트로 만들어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각형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목욕을 한 뒤엔 "자네들도 빨리 씻어"라며 수행 직원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시로 비서실 직원을 모두 모이게 해 그들의 애로에 귀를 기울인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말단 직원까지 불러 "요즘 하는 일 좀 얘기해봐라", "좀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냐"며 질문을 던지고 경청한 것. 평소 매던 넥타이와 외국에서 받은 선물들을 한 무더기나 내 놓으며 "쓸 만한 거 있으면 찾아봐라"고 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 양 고문의 기억이다.
그는 이어 "회장님은 항상 새벽 4시반에 기상했고, 냉ㆍ온욕과 골프로 건강을 지켰다"며 "음식은 소식인 편이나 지방 순시 일정을 짤 때 점심은 항상 전주에서 하시겠다 해서 그렇게 맞췄다"고 소개했다. 신세계백화점에 전주비빔밥이 처음 입점한 것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다. 모밀국수와 제일제당에서 나온 고단백 국수도 호암이 즐기던 메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안양골프장을 찾을 때면 대접했던 것도 고단백 국수다.
그러나 이처럼 자상하고 따뜻했던 호암이 사업에서만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치밀하게 실행했다. 양 고문은 "회장님은 임직원들에게 현재보다 미래의 가능성을 더 중시할 것을 주문하곤 했다"며 "특히 최고경영자(CEO)는 종업원의 정신적인 만족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호암이 현재의 삼성을 본다면 과연 뭐라 할까. 양 고문은 "회장님은 항상 '정상에 도달했을 때가 바로 변신해야 할 때'라며 상품이든 사업이든 새 분야를 꾸준히 개척할 것을 지시하곤 하셨다"며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잠도 못 이루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 오늘의 삼성이 있게 된 것이지만 이 전 회장이 이미 지적한 대로 언제든지 구멍가게로 추락할 수도 있는 만큼 긴장을 늦춰선 안 될 것"이라고 답했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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