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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상) "한국 경제의 대부" 생가엔 평일에도 300명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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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상) "한국 경제의 대부" 생가엔 평일에도 300명 발길

입력
2010.02.01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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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전인 1910년 나라를 잃는 수모를 겪은 그 해, 한 인물이 태어났다. 바로 호암 이병철(1910~1987) 삼성 창업주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쌀 300석을 밑천으로 탁월한 사업가 기질을 발휘,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삼성전자 등을 일으키면서 글로벌 삼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자본주의 이행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순조롭게 이행시킨 우리 경제계의 대부로 평가 받고있다.

그리고 경술국치 100년만인 2010년, 우리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는 일본의 전자 회사 10곳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이익을 내는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발자취와 인간적인 고뇌, 21세기 호암 정신 등을 2회에 걸친 시리즈를 통해 돌아본다. 』

지난달 29일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경남 의령군 중곡면 중교리. 시냇물과 돌담길 사이를 따라 고즈넉한 분위기의 마을 안쪽으로 걸어가자 활짝 열린 솟을대문 안쪽으로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생가 방문객들이다. 겨울 바람이 찬 금요일 오후 왜 이들이 여기를 찾은 걸까.

벽오동과 회화나무, 백일홍이 곳곳에 심어진 마당으로 들어서자 우물을 앞에 둔 단아한 일자형 기와집인 사랑채가 인사한다. 기둥엔 추수위신옥위골(秋水爲神玉爲骨ㆍ맑은 가을 물을 정신으로, 옥을 뼈로 삼다) 사원여해필여연(詞源如海筆如椽ㆍ문장은 바다처럼 넓고, 글씨는 서까래처럼 웅장하다)이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귀가 걸려있다. 전통적인 유교 가문임을 짐작하게 하는 주련이다.

실제로 호암의 할아버지는 시문과 성리학에 능해 서당 문산정(文山亭)을 세웠고, 아버지도 '영화(榮華)는 유한하나 문장은 무한하다'라고 가르치곤 했다. 호암이 만약 순탄한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도 십중팔구 유학자가 됐을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문산정에서 천자문과 논어 등을 공부했다. 30분 거리의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문산정은 전쟁이 난다 해도 책 읽는 데만 전념할 수 있을 정도의 고요함을 안고 있다.

사랑채에 이어 또 하나의 우물을 지나면 안채가 나온다. 1910년2월12일 이곳에서 호암의 탄생을 알리는 울음 소리가 이후 한국 경제를 깨웠다. 안채의 뒤쪽은 대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병풍처럼 짙은 숲을 이뤄 상서로운 기운마저 느껴진다. 호암의 생가는 마두산 내청룡 끝자락의 혈(穴)에 자리잡고 있고, 집 앞을 흐르는 남강도 이곳을 천천히 휘감아 돌면서 역수(逆水)를 만들고 있어서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게 풍수지리학자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안채 오른편엔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쌓아 두던 큰 광이 천석꾼 집안의 면모를 새삼 확인시켜 준다. 한 때 30명이나 되던 노비도 그가 아버지께 건의해 풀어줬다.

안채에서 볼 때 왼편의 바위도 이곳이 결코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보여준다. 작은 집채만한 바위에는 밭 전(田)자 수백개가 숨어있다는 게 동네 사람들의 전언. 사람들은 또 쌀 가마니를 쌓아 놓은 모습과 거북이, 두꺼비, 자라 등 장수와 부를 상징하는 동물들 모습도 바위에서 숨은 그림처럼 찾아냈다.

사실 호암의 생가를 찾은 사람들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곳도 바로 이 바위 앞이다. 이날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온 문충영 우주공인중개사사무소 상무도 바위를 한참 동안 안은 채 "회장님처럼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기원했다. 호암 생가 관리자인 이무형 소장은 "평일에는 300명, 주말에는 9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방문한다"며 "자영업자, 중소기업 사장뿐 아니라 최근에는 신혼부부들도 와서 부자가 되게 해달라며 소원을 빌고 간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호암의 생가를 찾는 것은 대부분 부자가 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세운 삼성은 한국 최고 재벌일 뿐 아니라 이젠 세계적인 기업이다. 삼성의 지난해 매출은 200조원을 돌파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성뿐 아니라 CJ, 새한, 한솔, 신세계도 모두 그의 손길에서 출발했다. 호암의 기(氣)를 받아 부자가 되고 싶은 맘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기리는 발길이 이어지는 데엔 나라를 위하여 사업을 펼쳤던 '사업보국'이란 그의 기업가 정신과 사람을 중시한 '인재제일'이란 그의 인본주의 사상이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우리 민족이 가장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해에 태어났음에도 절망하지 않고 도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화를 만들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 때, 우린 영원히 잘 살기 힘들 것이라는 패배감이 지배하던 그 때, 그는 분연히 일어나 기업을 일구고 일자리를 만들며 희망을 외쳤다.

그는 1963년5월30일부터 6월5일까지 본보에 기고한 '우리가 잘 사는 길'이란 글에서도 우리가 가난한 이유는 쇄국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유능한 지도자를 육성할 수 없었던 인적 자원의 부족 때문임을 지적한 뒤, 더 이상 자학하지 말고 일단 해외 차관으로 전기 도로 수도 가스 등 사회 공공 사업을 일으킨 뒤 국가 장래에 대한 희망을 안고 소득 증대를 위해 힘을 합치자고 역설했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바랐던 그의 꿈은 이제 삼성전자가 사실상 세계 최대 전자기업으로 성장하면서 눈앞의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날 생가에서 만난 40대 후반의 한 남성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곳을 찾는데, 다녀갈 때마다 맘이 편해지고 힘이 샘솟는다"며 "호암처럼 큰 기업가가 많이 나와야 서민들도 다 잘 살 게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호암은 이미 고단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희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의령=박일근기자 ikpark@hk.co.kr

■ 호암의 일대기

호암은 1910년 두 누이와 형이 있는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어머니 안동 권씨는 39세였다. 호암이 공부를 시작한 것은 6살 때로 <천자문> 을 떼는 데 1년 남짓 걸려 출중하다 하긴 힘들었다.

그는 11세 때 둘째 누이의 시댁이 있던 진주로 나가 지수보통학교(초등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자신이 태어난 중교리가 작은 곳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그는 첫 여름방학 때 내친 김에 서울로 가 공부할 것을 결심한다. 이렇게 해서 다시 편입한 게 수송보통학교다. 그러나 석차는 50명 중 35~40등.

지기 싫어했던 그는 1년 동안 보통학교 5, 6학년 과정을 조기에 끝낼 수 있는 중동중학으로 다시 입학한다. 26년 가을 결혼한 뒤 이번에는 아예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부산에서 시노모세키로 가는 선상에서 호암은 배 멀미에 1등 선실로 옮기려다 일본인 형사에 제지 당하면서 망국의 설움을 체험한다. 그러나 이 때의 사건은 훗날 그를 나라를 위한 사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30년 와세다대 정경학부에 입학한 그는 몸이 좋지 않아 2학년 때 중퇴한 뒤 귀국한다. 이후 그는 실의에 빠져 서울과 고향 친구들과 골패 노름 등을 하며 소일했다. 그런 그를 사업에 투신토록 한 것은 바로 자녀들이었다. 그는 달빛을 안고 평화롭게 잠든 세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났다고 밝혔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쌀 300석을 밑천으로 그가 36년 처음 문을 연 기업이 마산 협동정미소. 마산은 당시 수백만석의 쌀이 모이는 곳으로 도정료를 줘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나아가 호암은 10대의 트럭을 보유한 회사까지 매수했다. 이어 대대적 토지 매입에 나서 200만평의 대지주가 됐고 쌀 생산에서 도정, 운송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한다.

그는 다소의 굴곡은 있었지만 이후 사업마다 승승장구한다. 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세운 것을 비롯, 48년 서울에서 삼성물산, 53년 부산에서 제일제당, 56년 대구에서 제일모직 등을 설립했다. 초기에는 수입 대체 산업에 집중했던 그는 69년 삼성전자, 74년 삼성석유화학ㆍ삼성중공업, 77년 삼성조선ㆍ삼성정밀 등 제조업 특히 전자와 중공업을 일으키는 데에 다시 헌신한다. 그는 또 63년 동양방송 설립, 75년 효행상 제정, 82년 호암미술관 개관, 평생에 걸친 국악인 후원 등 각 분야에 선구적 발자취를 남기고, 87년11월19일 '사업보국'으로 일관했던 한 평생을 마감했다.

박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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