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

입력
2010.02.01 04:09
0 0

한 번은 쓰다듬고

한 번은 쓸려 간다

검은 모래 해변에 쓸려 온 흰 고래

내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지갑엔 고래의 향유가 흘러 있고 내가 지닌 가장 오래된 표정은 아무도 없는 해변의 녹슨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씹어 먹던 사과의 맛

방 안에 누워 그대가 내 머리칼들을 쓸어내려 주면 손가락 사이로 파도 소리가 난다 나는 그대의 손바닥에 가라앉는 고래의 표정, 숨 쉬는 법을 처음 배우는 머리카락들, 해변에 누워 있는데 내가 지닌 가장 쓸쓸한 지갑에서 부드러운 고래 두 마리 흘러나온다 감은 눈이 감은 눈으로 와 서로의 눈을 비빈다 서로의 해안을 열고 들어가 물거품을 일으킨다

어떤 적요는

누군가의 음모마저도 사랑하고 싶다

그 깊은 음모에도 내 입술은 닿아 있어

이번 생은 머리칼을 지갑에 나누어 가지지만

마중 나가는 일에는

질식하지 않기로

해변으로 떠내려온 물색의 별자리가 휘고 있다

●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어릴 때는 그런 말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더군요. 조금 더 살아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고개를 들면 밤하늘에 달이 보이니까 거기 달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칩시다. 그럼 구름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는 밤에 우리는 어떻게 달의 존재를 믿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해안선이 밀려왔다가 다시 물러나니까. 그런 식으로 달의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이죠. 세상에 보여줄 수 없는 사랑은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 볼 수 없는 사랑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보지 못할 뿐. 그런 점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세심한 관찰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네요.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는 말, 일리가 있는 것이죠.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