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지난 18일자 <지평선> 난에 소개했던 24년 전 호랑이 취재담을 다시 언급할 수밖에 없겠다. 칼럼은 한국인에게 각별한 호랑이의 존재감을 다룬 것이지만, 아득한 그 때의 취재경험이 유독 선명한 까닭은 사실 부끄러움 때문이다. 지평선>
1986년 호랑이해 벽두의 기사는 한국호랑이의 생존 기대감을 한껏 부풀리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일제 때 사라진 호랑이가 서식조건이 훨씬 나빠진 그 때까지 남아있을 개연성은 거의 없었다. 오지주민들의 생생한 호랑이 경험담은 대개 부풀려진 것이거나 착각의 소산일 터였다.
의도에 맞춘 사실 선택이 문제
결론은 "그 정도의 발자국과 이빨자국 크기라면 호랑이밖에는 없다"는 전문가 코멘트로 대신했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는 다음 말은 빠졌다. 경험담과 관련해 "그 노인네들 말은 다 허풍"이라던 다른 주민의 말도 걸러졌다. 기사를 구성한 사실들은 다 팩트(fact)이되 반대쪽 사실은 애써 무시함으로써 결국 실상을 왜곡한 기사가 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지 않으면 기사의 맛과 임팩트가 떨어지니까. 초년기자 때의 이 부끄러움은 이후 비슷한 유혹에 빠질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지렛대가 됐다.
서툰 자기고백을 길게 한 까닭은 사건의 본질도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의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는 꽤 괜찮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한 주제만으로 1시간 가까이 시청자 눈을 잡아매는 흡인력부터 간단치 않을뿐더러 도축장 실태, 피해자와 한미 당국자 및 시민단체 관계자 인터뷰, 관련 문서 등 공들여 모은 자료들을 매끄럽게 연결해낸 솜씨도 돋보인다. 그러나 긍정평가는 프로그램 구성의 형식적 측면에 한할 뿐이다.
은 무죄이유를 공개했다. 당시로선 아레사 빈슨의 사인을 인간광우병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는, 납득할 만한 정황들이 제시됐다. 하지만 정작 본질은 다른 것이다. 문제는 의도와 방향이 너무도 선명했던 탓에 그에 맞춰 사실들이 집중 선택되고 일부는 과장까지 됐다는 데 있었다. 반대쪽 사실은 거의 무시되거나 소홀히 다뤄졌다.
국민들 사이에 "차라리 청산가리를 먹겠다"는 따위의 공포심리가 번져간 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앞의 호랑이기사처럼 개별 팩트는 틀리지 않았어도 전체적으로는 분명 왜곡되고 과장된 프로그램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1심 판결에다 '정의, 진실의 승리'라는 식의 의미 부여는 대단히 부적절하다는 뜻이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사건이 갖는 상징성이다. 이 도마에 올랐지만 일방적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이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의도와 방향에 따라 사실을 선택하고, 그렇게 도달한 편향적 결론을 진실처럼 주장하는 것은 우리 언론 전반의 일반적 행태다. 온갖 갈등을 생산, 확대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신뢰마저 훼손하는 일방적 저널리즘의 병폐는 이번 판결을 놓고도 예외 없이 재연됐다.
법원 판결은 정의와 불의를 가리는 것이 아니다. 이번 판결만 해도 좁게는 공공정책 당국자에 대한 명예훼손 여부를, 넓게는 언론보도의 책임한계를 실정법에 의거해 판단한 것이다. 보도가 정책비판처럼 공익성을 띨 때는 명예훼손이 성립하기 어렵고, 그런 보도에 부정확한 내용이 있다 해도 취재과정에서 사실로 믿을 만했다면 또한 언론에 책임을 묻지 않는 건 상식이다.
언론 전체가 자성 계기 삼아야
1심 판단은 일부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사법체계 개편을 운운할 정도는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보수우파 언론의 판결 비난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힐 수 있는 자가당착이고, 진보좌파 매체들의 '정의' 운운은 판결의미를 잘못 해석한 억견이다.
그러므로 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논란의 결론은 명확하다. 보도엔 분명 문제가 있으되, 판결은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리한 주장과 비난이 난무하는 이념싸움의 난장판을 거두고, 언론 스스로의 자성 계기로 삼는 것이 이번 사건을 대하는 합당한 태도일 것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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