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庚寅)년 벽두 종교계 지도자의 신년사는 모두 하나로 통했다. 바로 화합과 소통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할 때 사회 곳곳에 관용의 꽃이 피어나고, 소통의 물길이 열린다"고 설파한 대한불교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의 신년사가 대표적이다. 정치 지도자들의 신년사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으로 차이를 존중하면서 다름을 조화시켜 나가고, 멀리 내다보며 열린 마음으로 대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년사를 보면서 '이념으로, 지역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벌이는 싸움이 올해라고 특별히 사라질 이유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새하얀 노트같이 새로 채워 나갈 것이 무궁무진한 새해니만큼 혹시…'라는 소박한 기대를 걸기도 했다. 하지만 새해가 된 지 채 한 달도 안돼 한국은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황에 빠졌다. 이런 기대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려주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지난해 12월 31일부터 새해 첫날인 1월 1일까지 예산안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처리를 두고 한판 승부를 벌이며 산뜻한 신년 맞이를 했던 정치권은 이후에도 크고 작은 문제로 티격태격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세종시 원안 수정이라는 대형 이슈를 계기로 전쟁에 돌입했다. 정치권이 갈등 만들기에서 눈부신 선전을 하자 사회 단체와 언론도 여기에 뒤질세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MBC PD수첩 제작진, 전국교직원노조 시국선언 교사 등의 재판 결과를 둘러싼 법원과 검찰의 대립을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쟁점화해 냈다. 갈등 극대화가 전문인 정치권 역시 이 문제를 확실하게 정치 문제로 만들었다.
새해 벽두부터, 그것도 예년과는 다른 강도로 이념과 지역 대립이 심화하는 것을 보면서 일찍이 칼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자본주의의 종말이 내가 사는 이 땅에서 현실화하는 것이 아닌가 무척 걱정이 됐다. 그래서 신년사에서 지도자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화합과 소통이 지금 이 시점에서 으뜸의 화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신하게 됐다.
그렇다면 화합과 소통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중용적 정치인과 사회 단체다. 남들이 싸울 때 자신도 뛰어들어 죽자 사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중재안을 내는 정치인과 사회 단체가 사회의 주류가 돼야 한다.
중용적 사회 세력은 실용주의도 함께 갖춰야 한다. 의미 있는 실용적 이슈를 적극 개발하고 제기해 사람들의 관심을 대립적 이슈에서 빼앗아 와야 한다는 얘기다.
세종시 원안 수정이나 각종 재판 문제를 예로 들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계층적, 지역적 이해관계가 뚜렷한 이런 이슈는 되도록 갈등 조정에 주력하면서 대대적 기술 개발 지원, 교육 투자 확대, 여성과 장애인 등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 개발 등 초계층적, 초지역적 이슈로 승부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력을 키우려면 유권자부터 바뀌어야 한다. 6ㆍ2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 정가가 달아오르면서 유권자들 사이에선 'A가 나오는데 그 사람은 정파가 어디다' '가문과 출신 학교는 어디다'는 얘기들이 회자된다.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공허한 관심에 불과하다. 이번에는 이런 사소한 것 말고 진짜 그 후보의 가치를 살펴봐야 한다. 바로 중용과 실용이다.
이은호 정책사회부장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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