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무성영화 '뱀파이어'는 1915년 만들어졌으나 30년 동안 관객을 만나지 못했다. 10부작에 총 386분이나 되는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사 고몽의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1945년에야 빛을 봤다. 세계 최대의 영화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공동설립자였던 앙리 랑글루아(1914~1977) 덕분이었다. 랑글루아는 필름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조각난 필름을 이어 붙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첫 상영회를 열었다.
범죄 집단을 추격하는 신문기자와 전 범죄자의 활약을 그린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630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도 시간 속에 묻혀버려야 했던 감독 루이 푀이야드(1873~1925)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이 영화에 감동한 알랭 레네 등은 훗날 세계 영화사를 뒤흔든 누벨바그(1960년대 장 뤽 고다르 등 일군의 감독들이 프랑스 영화계에 일으킨 새 바람)의 기수가 됐다. '뱀파이어'에서 영감을 얻은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싸야스는 1996년 장만위(張曼玉) 주연의 '이마 베프'를 만들어 푀이야드에게 존경을 바쳤다. 전설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 세상에 그 음을 전달해준 사연에 비견할 만한 이야기다.
자칫 쓰레기로 전락해 지상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뻔 했던 '뱀파이어'가 재조명을 받게 된 과정은 시네마테크의 기능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시네마테크의 역할이 단지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를 보관하고 상영하는 것을 넘어 시대가 알아보지 못한 옛 영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전파하는 것임을 '뱀파이어'는 웅변하고 있다.
'뱀파이어'는 지난 15일 서울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막을 올려 2월 28일 폐막하는 제5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하다. 2월 10일, 21일에도 상영될 이 전설의 명작은 지금 여기 서울에서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세계적 메트로 시티 서울에 번듯한 건물을 지닌 시네마테크 하나 없다는 민망한 사실, 그리고 힘겹게 시네마테크 역할을 해온 서울아트시네마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닫게 한다.
눈을 멀리 돌릴 필요는 없다. 부산시의 공간 제공과 재정 지원으로 운영되는 부산시네마테크는 서울에도 좋은 본보기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나서지 못하면 서울시라도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문화도시 서울은 말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시네마테크는 세계적 문화도시의 필수 사항이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