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맹사성이라면 충효의 상징이요, 음악에 조예가 깊고, 대표적인 청백리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맹사성도 신왕조 건국 과정에서 여러 번 좌천(1번), 파직(3번), 유배(2번)를 당했으며,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맹사성의 집안은 명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 맹의(孟儀)는 이조전서를, 할아버지 맹유(孟裕)는 이부상서를, 아버지 맹희도(孟希道)는 수문전(修文殿) 제학을 지냈으며, 처조부는 우왕대의 실력자 최영(崔瑩)이었다. 맹사성은 1386년(우왕 12) 문과에 장원 급제해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50년간 관료생활을 했다
맹사성은 위화도회군으로 처조부 최영과 장인 최담(崔潭)이 반역죄로 몰려 죽은 여파로, 외직(外職)을 전전했다. 이에 아버지 맹희도는 자기는 신왕조에 협조하지 않지만 아들만은 벼슬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진주(珍州)의 지방관을 맡았다가 곧 사임하기도 하고, 온양에 거동한 태조를 위해 그 덕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래서 맹사성은 내직인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그런데 맹사성은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잘못 정했다가 면직되었다. 맹희도는 아들을 복직시키기 위해 권근을 찾아갔다. 맹사성은 3년 정도 쉬다가 우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민공생(閔公生) 탄핵사건이 일어났다.
개국공신 장사정(張思靖) 사건의 처리를 지연시킨 민공생을 공격하다가 공주목사로 밀려난 것이다. 민공생은 태종의 처남이었다.
맹사성은 2년간 외직에 있다가 다시 우간의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두 달도 못되어 이거이(李居易)의 노비소송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온수로 유배됐다. 맹사성은 1년간 고생하다가 다시 동부대언이 되었다. 그런데 또 조대림(趙大臨)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조대림은 태종의 사위요, 조준의 아들이다.
조사해 보니 무고였다. 맹사성은 조대림도 잘못이 있다고 했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참형에 처해질 뻔했다. 세자를 비롯한 성석린·권근·하륜·이숙번 등 태종의 측근들이 구명운동을 벌여 겨우 죽음은 않았다. 그러나 아들 맹귀미는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태종은 곤장 100대를 때려 한주(韓州) 향교의 재복(齋僕)으로 정배했다.
맹사성의 관직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선 건국 이후 태종 말까지 26년 4개월 가운데 정확히 절반에 해당하는 13년 2개월을 좌천·파직·유배로 실의에 빠져 지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련은 부지불식간에 개국공신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보이거나 신왕조 개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성향 때문에 겪은 것이다. 거기다가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업무에 부주의한 험 때문에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맹사성은 어떤 정치세력과도 연관을 맺지 않았고, 경제적 비리도 저지르지 않았다. 거기다가 자기 절제와 결벽에 가까운 도덕성을 갖추고 있었다. 세종대에 맹사성의 이런 점들이 부각되어 그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공직자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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