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칼바람이 휘감아 돌며 얼굴을 때렸다.
겨우내 내린 눈이 얼음으로 변해 자칫 저 아래까지 미끄러질 것 같았다. 바람과 얼음 때문에 눈을 반쯤 감고 웅크린 채 걷다가 잠시 바람이 멈춘 순간 고개를 들었더니 하얀 눈이 앉은 산상의 고원이 펼쳐졌다.
모진 바람이 거친 소리를 토하며 눈가루를 뿌렸지만 유난히 하얀 능선 길은 저 멀리까지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었다. 이 높은 산에 이렇게 광활한 일망무제의 평원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여름의 고원은 싱그러운 초록 융단 같지만 오늘처럼 혹한과 삭풍이 연출한 메마르고 스산한 풍경은 겨울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이다.
삐죽삐죽 솟은 날카로운 봉우리와 순백의 빙하까지 있었다면 이곳이 히말라야 혹은 알프스라도 될 것 같았다. 산행을 시작한지 이제 1시간. 나는 선경에 취해 덕유산의 중봉(1,594m)을 지나고 있다.
산에 오르기 전 긴장감에 휩싸였던 나 자신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는다. 사실 겨울 덕유는 엄청난 강설과 혹독한 바람으로 유명한 곳 아닌가. 더욱이 이번 겨울 수십 년 만의 폭설과 혹한이 찾아왔던 터라 홀로 산에 들었다가 변고라도 당하면 어찌할지 은근히 걱정이 됐다.
내가 곤돌라에 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산행의 들머리로 삼은 전북 무주에는 구천동계곡을 끼고 오르는 등산로와, 설천봉(1,525m)까지 편히 올려주는 곤돌라가 있는데 시간과 힘을 아낀다는 핑계를 대며 기계의 힘을 빌렸다.
단숨에 설천봉에 도착해 최고봉 향적봉(1,614m)을 불과 10분 만에 오르고 보니, 비록 이번 산행의 목적이 숨결을 골라가며 산정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합당한 수고를 하지 않고 정상에 선 것 같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향적봉을 지난 뒤로는 인적이 뜸했다. 특히 중봉에 이르러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등산객들이 하나 둘 사라져 나 혼자만 남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 순간 거센 바람이 몰아치며 공포를 더한다.
겨울 산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눈이 아니라 바람이다. 무시무시한 바람이 귓전을 때릴 때마다 뒤를 본다. 큰 산에서는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된다. 이따금 맞은 편에 등산객이 나타나면 공연히 그들을 붙잡고 말을 붙인다.
겨울 덕유 종주는 날만 좋다면 해볼 만 하다. 높이 1,300~1,500m의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 되기 때문에 고도 차가 크지 않다. 악천후만 없다면 지리산, 가야산, 금원산, 기백산 등의 산줄기와 작은 마을들을 볼 수 있어 등반의 피로감도 적다.
설천봉을 출발하고 9㎞를 걸어 무룡산(1,492m)에 도착했다. 다져진 능선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쌓인 눈이 1m를 넘는 것 같다.
만약 내 몸을 던진다면 저 눈이 부드럽게 받아줄까, 공연히 실없는 생각을 한다. 바람이 눈을 흩날리지 않았다면 능선에는 어마어마한 눈이 쌓였을 것이고 사람이 출입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잠시 고개를 돌려보니 앞으로는 남덕유산(1,507m)으로, 뒤로는 향적봉으로 연결된 능선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길이가 비슷한 것을 보니 종주 길의 절반 정도를 온 것 같다.
그쯤에서 한 무리의 등산객과 반갑게 인사하고 그들을 추월해 오늘의 목적지 삿갓골재 대피소에 도착했다. 설천봉을 떠난 지 4시간30분만이다. 거리는 11.1㎞. 아직 힘이 남았지만 이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아까 만난 일행이 잠시 후 도착했다. 짐을 풀기가 무섭게 주방으로 달려가 식탁을 차리더니 "혼자 온 아저씨, 같이 갑시다"라며 잡아 끈다. 못이기는 척 주방에 들어서니 진수성찬이다.
짐을 줄이기 위해 취사 도구를 버리고 빵, 양갱 등을 갖고 온 나와 달리 이들은 고기를 굽고 김치찌개를 끓이고 따뜻한 밥을 지었다.
내게 젓가락과 술잔을 쥐어주더니 연신 소주를 따라준다. 일행 여덟 명은 순천의 효산고등학교 선생님들이다. 산은 이래서 좋다.
스쳐갈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나누는 곳이다. 이 선생님들, 내게 그랬듯 지식과 경험과 넉넉한 마음을 학생들과도 나눌 것이다. 시인이기도 한 안준철 선생님이 "겨울 소백산도 덕유산 못지 않다"며 권하고 내가 겨울이 끝나기 전 그곳에 다녀오리라 마음 먹는 바로 그 때 갑자기 취기가 올라온다.
속이 울렁거리는데다 얼굴 역시 불콰해진 것을 느꼈다.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실수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객은 자리를 뜰 시간이 된 듯했다.
감사의 뜻을 전하고 숙소로 돌아와 눕는데 외로움이 밀려왔다. 말벗이 이곳에 함께 있다면 나 역시 들뜬 기분으로 산중의 밤을 보낼 것이다.
혹시 누군가는 이 깊은 산을 홀로 헤매는 나를,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성마른 사람 혹은 세상사 팽개치고 산에 미쳐 돌아다니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볼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에 뒤척이다 설핏 잠이 들었다. 부지런한 등산객들의 배낭 챙기는 소리에 잠을 깼는데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일출을 보고 선생님들께 작별을 고한 뒤 남덕유산으로 출발해 2시간 만에 도착했다. 신고 있던 아이젠 한 짝을 잃어 되돌아갔다가 다시 온 시간을 합친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저 멀리 철탑에 이른다.
남덕유산에서 능선 길로 15.4㎞나 떨어진 향적봉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철탑이 있기 때문이다. 흉물이어서 곧 철거할 계획이지만 향적봉의 표식 혹은 이정표로 이만한 게 없다.
백두대간을 따라간다면 남덕유에서 육십령으로 가야 하겠지만 귀경 일정에 맞춰 경남 함양의 영각사로 내려갔다. 미끄러운 얼음 구간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더니 부산에서 왔다는 한 무리의 등산객이 특유의 사투리를 왁자지껄 쏟아내며 철 계단으로 올라온다.
산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대체로 사람이 많다. 게다가 국립공원에는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목이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돼 있어 만일의 경우 큰 도움을 준다. 겨울산에 무모하게 덤비면 안되겠지만 너무 겁 먹을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무주에서 시작한 산행은 함양에서 끝이 났다. 전체 거리는 19.4㎞이며 총 9시간이 소요됐다. 몸은 피곤하지만 녹초가 된 것은 아니다.
산에 있는 동안 덕유산은 바람과 눈을 멈추고 나를 안아주었다. 그 넉넉한 품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 만들었다.
● 여행수첩
■ 종주를 하는데 가장 필요한 장비는 아이젠, 그 다음은 스틱이다. 눈길이 잘 다져졌기 때문에 스패츠를 할 필요는 없다. 가끔 풀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아이젠 여벌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
■ 덕유산에는 향적봉 대피소(전화 063-322-1614)와 삿갓재골 대피소 등 두 곳의 대피소가 있다. 이곳에서 숙박하고 싶으면 덕유산국립공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예약하면 된다.
■ 종주를 할 경우 출발지와 도착지의 행정구역이 다른 만큼 교통편도 많이 다르다. 도착지의 대중교통편을 반드시 확인해야 귀가가 편해진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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