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뭐 배우는지 알아요?" 분명 아는 낌새인데 꿀 먹은 벙어리마냥 서로들 눈치만 본다. 참다 못한 듯 맨 뒷자리에서 "성교육"이란 정답이 새나온다. "풉" "키득키득" 애써 누른 웃음이 좌중으로 전염됐다.
"맞는데 왜들 그래요." 서울시립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 서영미(30) 교사의 변호에 힘입어 뒷자리에 있던 그 청소년이 "그런 이미지로 나가지마(모른 척 하지마)"라고 외쳤건만 되레 폭소만 키웠다. 아직 성(性)이 낯선 또래에겐 웃음이 명답일 수도 있겠다.
13일 서울 대림동 영남중의 한 교실, 동계훈련에 한창 구슬땀을 흘려야 할 야구부와 체조부 34명이 옹기종기 모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마련한 '학생운동선수 성(性)인권교육'을 받기 위해서다.
3분 정도의 동영상강의엔 시큰둥하더니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5가지)을 제시하자 평소 궁금증과 나름의 생각을 무더기로 쏟아냈다. 서 교사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각각의 상황설정과 학생들의 의견, 교사의 해법을 살펴봤다.
1. 선배가 회식자리에서 몸을 더듬거나 껴안고 볼을 비빌 때
체조부 박지수(15)양이 "이거 주제가 안 좋아"라며 애써 피했다. 서 교사가 "종종 있을 텐데, 솔직하게 얘기해보자"고 설득했다. "남동생이 당한 적이 있다" "저랑 친구 몇몇도 당했다"는 증언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학생들은 "친하니까 장난이라 여겼는데 너무 과하긴 하다"고 웃었다. 서 교사는 "분명히 성폭력 상황"이라고 못박았다. 해결책은 "코치나 다른 선배, 부모에게 해당 선배의 성향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2. 지도를 핑계로 한 과도한 신체접촉(예컨대 지도자가 골프선수를 뒤에서 껴안듯 가르친다)
"부모에게 말한다"는 대답은 양반. "골프채로 (코치를) 때린다"는 과격한 답도 나왔다. "폭력은 절대 안 된다"고 주지시킨 서 교사는 "신체접촉이 많은 유도부 여자선수들은 동성지도자를 둔다"고 일러줬다. 남학생은 남성지도자, 여학생은 여성지도자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 학교 체조부엔 남녀 전임코치가 따로 있다.
3. 코치 선생님이 안마를 시킬 때 거절할 수 있나
학생 대부분은 "일단 안마를 해준 다음 가급적 피하겠다"고 했다. 상하관계가 엄격하고 지도자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운동부 특성상 쉽게 거부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 교사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중학교 시절 핸드볼 선수였는데, 선생님이 유독 한 친구한테만 안마를 시키길래 '힘드니까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하자'고 제안했죠. 그 뒤 안마 요구 자체가 사라졌어요." 그는 "처음엔 쉽지 않지만 '싫다'는 표현을 버릇처럼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4. 여학생이 옆에 있는데 남학생들이 모여 '야동'(야한 동영상)을 보는 건
학생들은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돼 어쩔 수 없다" "본능이다" 등 남학생들의 변명이 술술 나왔다. 야구부 주장 김기담(15)군은 "여자들도 함께 보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서 교사는 "여자는 즐겨보지 않고, 보더라도 혼자 보는 편"이라고 설명한 뒤 "여학생이 주변에 있는데 야동을 보는 건 성폭력이 될 수 있다"고 충고했다. "음란물을 남에게 보여주거나 유통하는 건 불법"이라는 경고도 했다. 학생들이 잠잠해졌다. 그간 몰랐던 사실을 깨우친 것처럼.
성기 접촉 문제 등 지면에 담기 남세스러운 문답도 많았다. 평소 성에 대한 호기심이 그만큼 많았다는 방증일 터. 서 교사는 난처한 질문에도 아이들 눈 높이에 맞는 대답을 해주느라 고심했다. 예컨대 "운동경기에서도 성기공격은 반칙이잖아요.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니까요" 하는 식이다.
학생들은 만족스러운 눈치다. 체조부 김지연양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줘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 김동휘(33), 김아연(31) 체조부 코치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신뢰가 더 견고해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교육은 인권위가 2007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스포츠분야 인권개선 사업의 대표 프로그램이다. 학생운동선수 6할 이상이 운동 중 성희롱과 성폭력을 당했다는 조사결과에 따라 지난해 12월부터 희망 학교의 신청을 받아 방과 후와 방학 중에 실시하고 있다. 최근까지 130개교 2,302명(남 1,789, 여 513)이 교육을 받았다.
스포츠인권교육 담당인 최은숙 주무관은 "선후배간 지나친 위계, 폐쇄적인 문화가 여전한데다 수업에 잘 들어가지 못 해 일반학생보다 사회화가 더뎌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는게 학생운동선수의 현실"이라며 "피임 임신 출산 등 생물학적 현상을 가르치는 일반 성교육과 달리 성폭행 예방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했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