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기만 하던 그가 새롭게 태어났다. SBS 사극 '제중원'에서 조선 후기 성균관을 박차고 나와 양의(洋醫)의 길을 택한 백도양을 연기하는 연정훈(31)의 눈빛에선 강인한 남자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서양 학문을 공부하는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아버지가 서양 서책을 불태우는 장면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아버지를 쏘아보는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로맨틱 가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미소년 같은 외모에 카리스마를 담아 돌아온 그를 18일 오전 창덕궁 촬영 현장에서 만났다.
추운 날씨에 감기 기운이 있어 약간은 코 막힌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그였지만 표정만큼은 밝았다. "제가 워낙 현장에서 즐겁게 일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스태프나 주위 분들이 편하게 해주셔서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의 12년 연기 인생에서 사극 연기는 처음이다. 의학 드라마도 처음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생소한 분야를 소화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로맨틱 가이 특유의 생글거리는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도양의 캐릭터가 정말 끌렸어요." 자신 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며, 원하는 것을 위해 주저 없이 달려가는 백도양의 매력에 빠진 그에겐 처음 접하는 사극도, 의학 드라마도 겁나지 않았다. 그는 2007년 군 제대 후 2008년 MBC '에덴의 동쪽'에서 입체적인 캐릭터인 동욱 역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전작에서도 '곱상한 남자'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동욱과는 다른, 이전에 채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을 당찬 백도양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군 생활 하는 동안 연기 변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다. 제대 후 "악역 같은 캐릭터가 많이 끌렸다"고 털어놓은 것도 그 고민에서 비롯된 것일 터.
그렇다고 첫 도전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할 순 없다. 그에게 의사 연기의 모델이 됐던 인물은 '하얀 거탑'의 장준혁, 사극의 본보기가 됐던 인물은 '선덕여왕'의 미실이었다. "장준혁을 보면서 진짜 의사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리얼리티가 느껴졌어요. 그래서 '하얀 거탑'은 처음부터 다시 다 봤어요.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악역으로 비칠 수도 있는데, 도양과 미실은 그런 부분에서 많이 닮았어요. 사극 톤이나 악역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고 캐릭터의 진정성을 표현하는 방법은 미실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가 참고한 인물들은 모두 배우가 캐릭터를 자신의 색깔로 완벽하게 재탄생시킨 경우였다. 군대도 다녀오고 30대 문턱도 넘어선 그가 꿈꾸는 제2의 연기 인생, 그 중심에는 '연정훈 표 캐릭터'가 있다. 최근 그가 가장 감명받은 캐릭터로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를 꼽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중원'에서도 그는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도양을 그려내려고 노력 중이다.
"아버지나 아내나 항상 잘했다고 말해줘서 제가 정말 잘하고 있는지 제대로 된 모니터를 할 수가 없어요.(웃음)" 그에게 무한 신뢰를 보이는 가족들은 언제나 그의 든든한 후원자다. 하지만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 할 때는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의 조언을 많이 듣는단다. 그들의 냉철한 평가가 많은 도움이 된다고.
아직도 뭇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인 아내 한가인씨가 진정한 품절녀가 되려면 2세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질문에 "60년 만에 찾아온 백호랑이 해를 놓칠 순 없죠"라며 범띠 2세에 대한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그는 "아내의 제안도 있고 해서 차기작은 멜로로 생각 중"이라고 했다. 강한 남자의 카리스마든 부드러운 남자의 자상함이든, "저 역할은 연정훈밖에 소화 못한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배우로 거듭날 날이 기다려진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양 같이 그도 도전 앞에 주저함이 없으니 말이다.
김경준 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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