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커피 한 잔과 습작노트, 국어사전이 자리를 꿰찬 방 안은 흡사 문인의 작업실 같다. 머리를 싸매고 연신 뭔가를 끄적거리다 박박 지워버리는 방 주인 유보람(22)씨도 예사롭지 않다. 구겨지거나 찢겨진 종이만 나뒹굴었더라도 소설가라고 믿었을 터.
자세히 살펴보니 유씨가 씨름하고 있는 건 문장이 아니라 단어였다. '생채기' '도끼' '불편한' 등 언뜻 유사성이 없어 보이는 단어들이 공책 위에서 난무한다. 한참 뒤 유씨는 홀린 듯 "고삐"라고 외치더니 빠른 손놀림으로 사전을 뒤진다. '말 소를 몰거나 부리려고 재갈이나 코뚜레, 굴레에 잡아매는 줄.'
의미를 곱씹던 유씨의 입가가 웃음에 잠긴다. 고작 음절 두 개짜리 단어 하나를 찾느라 장장 하루가 갔다고 했다. 지난달 16일 경기 군포시 당동의 유씨 집은 고삐 풀린 기쁨에 들떴다. 도대체 무엇에 쓰는 단어일까?
단어에 집착하는 사람들
의문은 21일 뒤 풀렸다. 유씨는 지난 6일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가 주최한 제1회 바른말고운말 표어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 그것도 1등(으뜸상)이다. 상금 100만원에 이어 덤으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까지 받았다.
그의 출품작(표어)은 '고삐 풀린 말들 속에 멀어지는 우리 사이.' 누구나 아는 단어지만 아무나 조합할 수 없는 고삐의 재발견이 그에게 영예를 안긴 셈이다.
유씨는 사뭇 여유롭다. "비속어와 외계어가 범람하는 청소년의 언어생활을 핵심적으로 꼬집는 단어를 찾는데 주력했어요. 처음엔 날카로운 말만 생각나서 고생했죠. 표어로는 부적절하거든요." 그는 "제가 지은 표어가 한 편의점 업체를 통해 전국에 붙게 된다는 소식이 상금보다 뿌듯하다"고 웃었다. 그는 복학(중앙대 산업경제과4)을 앞둔 평범한 대학생이다.
유씨의 활동이 이색적인 것도 아니다. 기업과 공공단체가 최근 소비자 관심 유도차원에서 상품명(네이밍) 공모 및 사업슬로건(캠페인 표어 포함) 공모전 등을 늘리면서 여기에 취미 삼아 도전하는 이들도 덩달아 늘었기 때문. 이들은 '쏠쏠한' 재미와 '특별한' 보람까지 일석이조라 입을 모은다.
실제 유명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네이밍관련 카페는 줄잡아 20곳이 넘는다. 전체회원은 약 1만5,000명에 이른다. 이중 2007년 6월 처음 문을 연 국내 최대 네이밍정보카페 '브랜드풀'(Brand Pool)은 회원이 5,700여명(지난해 말 기준)이다.
운영자 진근용(32)씨는 "기업과 공공단체가 홍보 목적으로 마련하는 공모전이 1년에만 수백 건, 지난해에는 500건이 넘었는데, 회원 중 10% 정도는 공모전마다 빠짐없이 도전한다"고 했다. 서울 반포대교 양 옆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의 이름(무지개분수)도 이 카페(공모전 공동수상)에서 지었다.
회원 구성은 다양하다. 그저 취미인 사람부터 직장인, 마케팅 담당자, 카피라이터 등이다. 물건 작명이 전문인 현직 네이머(namer)는 5%가량이다. 카페회원들은 저마다의 필살기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한다고 했다.
고동현(43)씨는 15년간 상표허가 분야에서 매일 수백 건의 상표를 검토하다 보니 좋은 이름을 찾는데 재빠르다. 그의 주무기는 반복이다. 고씨는 "한 시간 정도 집중해 공고를 계속해서 읽으면 주최자의 의도가 스르르 풀린다"고 귀띔했다.
회사원 김회동(27)씨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며 오고 갈 때 좋은 이름이 잘 생각난다"고 했고, 유보람씨는 "평소 생활하면서 좋은 말이나 좀 생소하지만 아름다운 고유어나 단어를 만나면 즉시 찾아보고 적어 놓는다"고 나름의 비법들을 공개했다.
이름으로 돈 벌고 기부도 한다
이들은 네이밍의 매력으로 "작품이 채택됐을 때 성취감도 크지만 '짭짤한' 용돈벌이로도 손색이 없다"는 점을 꼽았다. 고씨는 2000년부터 최근까지 600여 공모전에 참가해 수십 차례 상을 받았고, 상금수익만도 1,100만원이 넘는다. MP3, 잡지 구독권 등 가족들에게도 깜짝 선물을 안겼다.
고씨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월드인'(World Inn)이다. 월드인은 2002한일월드컵 기간 중 정부가 공식 지정한 중저가 호텔과 민박 등 숙박시설 11만여 곳의 대표이름으로 쓰였다.
"3년 전엔 한 달에 한번 꼴로 상을 받았다"는 그는 최근 아내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재작년부터 일이 바빠져 (네이밍에) 신경을 못 쓰고 있는데, 얼마 전 아내가 '요즘은 소식이 뜸하네'라는 거에요. 그래서 요즘 또 고민 좀 하고 있죠."
이들은 착한 일도 계획하고 있다. 네이밍에 이골이 난 회원들답게 프로젝트 명은 '매아리'(매일 부르는 아름다운 이름) '다. 비영리단체나 복지기관 등에 무상으로 브랜드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취지다.
홈페이지와 안내책자가 완성되면 전국의 관련단체에 배포, 희망하는 곳에 본격적인 '명칭기부'를 할 참이다. 자신湧?만든 브랜드(혹은 상품) 이름과 표어로 자원봉사와 기부가 더욱 늘어나는 게 이들의 소망이다.
"곱고 아름다운 말, 잘 짜진 직물처럼 심금을 울리는 단어의 조합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윤활유 역할을 하겠죠?" 웃음을 머금은 진씨의 눈동자가 먼 곳에 닿았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강성명기자 sm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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