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0여년간 사법부는 주요 시국ㆍ공안사건 등에서 반인권적 판결로 오점을 남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대상을 반영한 이정표 같은 판결들을 통해 우리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법원행정처 사법사편찬위원회는 최근 발간한 <역사 속의 사법부> 에서 이처럼 시대상을 반영해 사회변화를 이끌어낸 주요 판결들을 소개했다. 역사>
80년대 초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일반직 정년은 55세인 반면, 대부분 여성들로 구성된 전화교환원의 정년은 43세였다. 이에 반발한 한 여성 전화교환원이 남녀차별금지를 규정한 근로기준법에 어긋난다며 82년 정년퇴직무효확인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88년 "합리적 이유 없이 여성근로자를 조기 퇴직하게 한 부당하게 낮은 정년"이라며 무효판결을 내린다. 이는 직장 내 남녀평등원칙을 확인한 획기적인 판결로 평가 받고 있다.
청주시의회는 91년 청주시장과 내무부 등의 반대 속에 '행정정보공개 조례안'을 의결했다. 이듬해 청주시장이 낸 의결무효 확인소송에서 대법원은 이 조례가 합법임을 확인했다. 국내 최초로 정보공개조례의 합법성을 인정한 이 판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정보공개조례 도입이 잇따랐고, 96년엔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90년대 여성 근로자가 늘면서 성희롱 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가운데 93년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은 국내 최초로 성희롱이 법적 분쟁으로 비화한 사건이었다. 대법원은 98년 "사실상 지휘ㆍ감독관계에 있는 가해자의 그 같은 언동은 분명한 성적인 동기와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며 우 조교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은 성희롱 개념이 실정법에 도입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90년대 들어 성전환자가 법원에 호적상 성별 정정을 신청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통일된 기준이 없어 법원마다 판결이 달랐다. 2004년 대법원은 수술을 통해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을 바꾼 50대에게 성별 정정을 허가함으로써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는 법원이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적극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평가됐다.
이밖에 사법부는 돌연사의 업무상 재해 인정(93년 대법원), 생수의 국내판매 허용(94년 대법원), 동성동본간 금혼조항 폐지(97년 헌재) 등 여러 판결 또는 결정을 통해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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