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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에… 어디 갔을까, 그많던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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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에… 어디 갔을까, 그많던 노인들

입력
2010.01.18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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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68)이 우뚝 선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 아래 잔뜩 웅크리고 있다. 벌써 2시간째라고 했다. 14일 낮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은 체감온도가 영하 14.4도(기상청 측정)였다. 살은 따갑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분명 온다고 했는데…." 노인은 이름도 성도 모르는 말벗을 기다린다고 했다.

"춥지 않냐"고 했더니 등뒤의 비닐가방을 가리켰다. 생활정보지가 가득했다. 곧바로 신문 한 부를 꺼내더니 엉덩이 밑에 깔린 신문지 위에 포개고 다시 앉았다. 그 알량한 온기는 금새 식고 무정한 시간은 더디 갔다. 친구는 오지 않았다.

20m 떨어진 지점에선 중절모 노인이 검은 비닐봉지를 털었다. 비둘기와 참새 떼가 우수수 내렸다. "잘 먹네. 춥지?" 라면 쪼가리를 탐하는 녀석들이 대견한 눈치다. "라면 끓여먹고 남은 거 모아뒀어. 지들도 춥고 배고프겠지." 새들을 챙기는 노인이 더 추워 보였다. 10명 남짓의 노인들이 텅 빈 공원을 지키고 있었다. 한파가 사방에서 몰려왔다.

잔인한 동장군은 서울 종묘와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을 몰아냈다. 날 좋은 날엔 줄잡아 1,000여명의 노인들이 찾아 노인들의 해방구로 불리는 곳이지만 최근엔 스산하다. 그 많던 노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12~14일 체감온도가 영하 12도와 15도를 오간 종묘와 탑골공원 일대를 뒤졌다. 2009미스코리아 선 차예린씨가 인턴기자로 취재에 나섰다.

얼어붙은 노인공화국

추워지면 탑골공원 뒷골목이 먼저 붐빈다. 해장국 1,000원, 칼국수 1,500원, 백반 2,000원 등 '저러고도 남는 게 있을까' 싶은 가격을 써 붙인 작은 식당들은 문전성시다. 무전취식한 할아버지를 뒤쫓는 식당 아낙도 있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무료급식은 상대 안 한다"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노인들의 활동무대다. 커피자판기는 쉼 없이 100원짜리 커피를 토해냈다.

잡동사니를 파는 좌판 리어카 2대도 탄력을 받았다. 목이 금세 마른 노인들을 위한 옛날 사탕(20개 1,000원)이 으뜸이지만 5,000원이 넘는 최고가 품목 향수도 꾸준히 팔린단다. 마음만은 청춘인 셈. 한 노인은 "2,000원짜리 영화관(낙원상가의 허리우드클래식)도 많이들 찾는다"고 귀띔했다. 근처 무료급식소도 북적거렸다.

포근하기로는 탑골공원에서 5분 거리인 경운동의 서울노인복지센터를 따를 수 없다. 매일 3,000명 이상이 점심을 해결하는데 1~3층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공원과 달리 할머니들이 많이 찾아와 점잖게 연애를 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더러 '꽃뱀'도 꼬인다고 했다.

탁구 요가 스포츠댄스 외국어공부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다만 프로그램을 쫓아다녀야 하고 정치색이 옅어 토론은 활발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이 엄동설한에도 공원에 남은 이들은 대개 정치파"라는 게 노인들의 분석이다.

종묘공원에 붙은 종로3가 지하철역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곳이다. 귀가하기 전 입담을 꽃피운다. 가끔 이발 봉사도 나온다. 14일 만난 유춘규(방이동 동현교회 집사)씨는 "2007년부터 둘째, 넷째 주 목요일에 와 머리를 깎아준다"고 했다. 몇몇 할아버지는 자원해서 접수를 받고, 흩어진 머리카락을 치웠다. 지나던 외국인이 "이런 봉사는 처음 봤다. 원더풀"이라고 외쳤다.

지하철 역사도 추웠다. 어떤 이는 "노인들이 모이는 걸 막기 위해 난방을 안 하는 것"이란 의혹을 제기했다. 온도계를 확인해보니 종로3가역은 영하 3도, 부근 종각역은 영상 8도였다.

부러 그런 게 아니라 종로3가는 확 트인 반면 종각은 출입구가 좁아서 기온 차가 난다는 게 역무원들의 설명이다. 두 곳 모두 난방시설은 없었다. 가뜩이나 소외된 처지라 그런 오해마저 생긴 모양이다.

추위보다 무서운 건?

종묘공원과 탑골공원은 일을 잃은 노인에겐 직장이고, 토론을 즐기는 어르신에겐 학교이며, 지치고 고독한 이에겐 휴게공간이자 만남의 광장이다. 친박 친이 진보로 갈리는 정치파의 입김이 드세 노인공화국으로도 불린다.

최근 여론조사와는 달리 '정치1번가'라 자부하는 종묘공원의 여론은 진보로 기울었노라고 했다. 삶이 팍팍하니 정부가 하는 정책들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특히 복지 부문은 겉만 으리으리할 뿐 주던 것마저 뺏어가는 '속 빈 강정'이라고 했다.

한 할아버지는 "40만원이던 지원금이 1만~2만원도 아닌 10만원 가까이 줄어든 31만원이 됐다"고 하소연했다. 곁에 있던 장애인 부부는 "도합 20만원이 줄어들어 죽을 맛"이라고 했다. 정권홍보에 앞장서는 보수단체에 항의를 하는 일도 잦아졌다고 한다.

영하의 한기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이 정으로 녹였다. 자신의 100세를 기념해 매주 일요일 100줄의 김밥을 나눠주는 할머니, 매일 사비를 털어 4만원어치의 김밥과 빵을 돌리는 할아버지 등이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도 한몫씩 거들었다.

노인들의 소망은 소박했다. "겨울에 잠깐 간이천막이라도 세워주면 좋으련만." 몇 십억을 들여 각종 시설을 세웠다가 뜯어 욕을 먹는 광화문광장이 부근에 있으니 노인들의 요구가 무리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살가운 관심만 있으면 된다. 한파가 점령한 종로 일대엔 갈 곳 잃은 어르신들이 떠돌고 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차예린(한국외대 3학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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