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사법부가 걸어온 6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700페이지 분량의 '역사 속의 사법부'가 13일 발간됐다. 그러나 관심의 초점이었던 1960~80년대 시국사건 판결에 대한 반성의 정도가 약해 애초 이용훈 대법원장이 발간목적으로 밝혔던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이 책은 사법부 출범 60주년을 맞은 지난 2008년 9월,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 사법부가 겪었던 영욕의 과거사를 털고 가겠다는 대법원장 의지에 따라 편찬작업에 들어갔다. 당초 2008년 말에 탈고할 예정이었으나 과거사 청산에 대한 내부반발이 커지면서 결국 1년여나 지체돼 발간된 것이다.
특히 책 발간과 관련, '60~80년대 시국사건 형사판결에 대해 사법부가 얼마나 자기 과오를 인정할 것인가'에 시선이 모아졌지만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요 형사재판을 다룬 책 3부 3장은 인민혁명당(64년) 동백림(67년) 민청학련(74년) 오송회(83년) 사건 등 주요사건에 대해 개요와 검찰의 기소내용, 법원의 선고내용 등을 간략히 소개하는 선에 그쳤다. 나아가 사법부의 자기 반성보다는 수사기관(검찰, 경찰)이나 공안당국(안기부)의 간섭으로 인해 사법부 독립성이 훼손됐다는 논리가 자주 눈에 띤다. 자칫 책임회피로 비칠 수 있는 부분이다.
작곡가 윤이상 부부와 시인 천상병 등이 포함된 동백림 사건의 경우 "(피고인의 형량을 대폭 낮춘)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후 검찰은 크게 반발하면서 보안사범이나 간첩사범을 처벌하는 데 큰 차질을 초래하는 좋지 못한 판결태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정보기관이 법관을 감시했음을 강조하는 대목도 여러 군데서 자세히 소개했다. 예컨대'다리'지 필화사건의 경우 담당판사의 목소리를 빌어 "사건이 배정된 직후 가장 먼저 당한 압력은 중앙정보부 조정관의 방문이었다"고 전했다.
반면 각 시국사건 판결을 둘러싼 판사들 간의 내부갈등양상을 소개하지 않은 것은 과오의 원인을 외부로 돌린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책자 발간을 둘러싼 법원 내부의 갈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법원 관계자는 "발간 당시 일부 내용이 사법부 역사를 너무 낮게 평가하는 자학사관이라는 주장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 기록됐어야 할 주요사건이 빠진 경우도 생겼다. 당시 큰 사회적 이슈가 됐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75년), 아람회사건(80년),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85년) 등은 60년사에 제외됐다.
더욱이 사법부에 유리한 판결은 예외적으로 자화자찬에 가까운 평가를 내렸다. 96년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에게 각각 무기징역형과 17년 징역을 선고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법원은 이 판결로써 성공한 군사반란도 형사처벌 대상임을 분명히 해,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음을 밝혔다"고 적었다.
이 같은 논란을 예상한 듯 법원행정처의 이진성 사법사편찬위원장은 발간사를 통해 "어떤 조직도 밝은 면만 있진 않다"며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냉정하게 서술하되, 가치평가로 사실을 갈음하려 해서도, 역사의 빈 곳을 모자란 지식ㆍ식견으로 메워서도 안 된다"고 밝혔다.
문준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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