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2009년의 마지막 해가 저물 무렵 전남 신안군 안좌도, 김순단(86) 할머니는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세월에 눌려 굽은 몸은 헤진 누비 옷으로 가렸건만 삭풍은 얼굴의 주름들을 더 깊게 팠다.
지팡이 삼은 가녀린 우산대를 맨손으로 짚은 채 옥수수뻥튀기와 쥐포 네 개, 물 한 병을 쥐고 있었다. 저녁거리였다. 섬은 눈과 바람에 잠겼다. 버스는 오지 않고 눈만 징그럽게 왔다. 할머니는 가만히 서 있었다.
이날 최중규(목포경찰서 안좌파출소) 경사는 어김없이 순찰을 돌았다. 농로에서 굳어가는 할머니를 만났다. "아따 버스 기다리재라." 심드렁한 할머니를 순찰차에 태우고 40분간 논두렁 길을 헤쳤다. "나가 박복혀서 딸들도 사글세 살아라." 호의가 영 미안했던지 할머니는 신세한탄을 두서없이 펼쳤다.
마을(향목리)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외딴 곳에 오두막이 있었다. 오른 편은 주저앉고 창고는 무너졌다. 약 봉지가 널린 방 안은 얼음장이었다. 최 경사가 딱한 맘에 형편이나 가족관계 등 이것저것 묻는데도 할머니는 오직 한 단어만 끄집어냈다. "6ㆍ25(한국전쟁) 알아, 응?" 집요한 물음과 애절한 눈빛이 최 경사를 눌러 앉혔다.
김 할머니는 긴 세월을 더듬었다. 기력은 쇠하고 말도 제대로 안 나왔지만 기억만큼은 또렷했다. 앞뒤가 바뀌고 가끔은 연결고리가 한숨에 끊긴 할머니의 사연을 정리하면 이렇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김 할머니의 남편 최길환(94년 사망)씨는 조국의 부름을 받았다. 25세 꽃다운 청춘이었다. 그는 한강 이남을 지키다 인민군의 총탄을 맞았다. 왼쪽 어깨와 옆구리가 터져나가 허벅지 살을 오려 붙이는 등 3년간 국군병원에서 수술만 세 차례나 받았다.
고향인 외딴 섬에 돌아와 아내와 자식을 다시 만난 것만 해도 감사했다. 장정이라면 누구나 국가를 위해 참전했던 터라 자랑도 하소연도 하지 않았다. 왼쪽 어깨는 뼈가 드러나고 상처가 박힌 온몸은 흉물스러웠지만 작으나마 농사를 지으며 만족했다.
그러나 몸은 해마다 무너져갔다. 가혹한 섬 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들었고, 손발이 저려 농기구를 들기도 버거웠다. 평생 약을 달고 살았건만 숨지기 3년 전부터 온몸이 마비됐다. 대소변을 치우고 밥을 떠먹이는 일은 김 할머니의 몫이었다. 장성한 6남매는 이미 오래 전에 속속 집을 떠났다.
부부의 딱한 처지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이 국가유공자 신청을 해보라고 귀띔했다. 노(老)부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뭍으로 나와 병원의 검사를 받고 국방부에 관련 서류를 보냈다. 육지로 나온 날(목포까지 1시간 거리)은 하루가 빠듯해 신청서를 내는 데만도 몇 년이 걸렸다. 여관 신세도 졌지만 희망(국가유공자 선정)으로 고생을 눌렀다.
고생한 보람도 없이 94년 3월 25일 남편은 저 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나흘 뒤인 29일 육군참모총장의 직인이 찍힌 '전공상(전쟁이나 공무로 입은 상해) 확인통보서'가 날아왔다. 요지는 육군본부가 국가유공자 요건에 해당된 사실확인서를 국가보훈처에 통보했으니 관할지방청에서 신체검사(총상 여부 확인) 등 심사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남편은 이미 마을 귀퉁이 밭에 묻힌 뒤였다. 의지붙이를 떠나 보낸 상중(喪中)인 데다 글을 읽을 줄 몰랐던 할머니에게 뒤늦은 서류 한 장은 종이쪽에 불과했다.
할머니가 방 한쪽에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풀었다. 반이나 찢겨나간 빛 바랜 봉투엔 꾸겨진 '전공상 확인통보서'가 있었다. "울 영감 살아생전에 징하게 기다린 건디, 숨 넘어가기 전에도 '빨리 와야 자네가 편하다고' 노래를 불렀는디, 인자 뭔 소용이겄소. 영감이나 나나 무식한 게 죄지라." 최 경사는 홀린 듯 통보서를 고이 담아왔다. 그렇게 2009년이 기울었다.
최 경사는 경인년 새해벽두부터 바빴다. 우선 김 할머니의 사연을 '어느 섬마을 경찰관이 보낸 눈물겨운 호소문'이란 제목으로 경찰 내부 전산망에 올렸다. 5,000명이 읽었다.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동료도 있었다.
'본인이 사망해도 유족 진술, 진료기록 등을 제시하면 유공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힘을 얻은 최 경사는 의료보험공단, 목포보훈청 등을 찾아 다니고 있다. 16년간 묻혀있던 서류 한 장이 세상 빛을 본 셈이다. 그는 "전쟁의 상처, 파편의 상흔, 아니 조국을 위해 산화한 영령의 미망인이 더는 눈물 흘리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목포보훈청 관계자는 "오래 전 일이라 병원기록 등을 찾는 게 수월치 않겠지만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고, 김계형 안좌면사무소 복지계장은 "직원들이 나서서 (고인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 할머니는 새해 들어 몸이 아팠다. 13일 전남 목포시 목포중앙병원에서 만난 할머니는 "통보서가 옆쩜?있다고 하니 남편이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울먹였다. 그리고 띄엄띄엄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얼마 살지도 못하는데 무슨 혜택을 바라겄소. 국가를 위해 싸우고도 후유증 때문에 가족 앞에선 늘 죄인처럼 살았던 우리 영감 명예나 좀 회복하면 한이 없겄소."
올해는 한국전쟁 60주년이다. 할머니는 그 신산(辛酸)의 세월을 버스를 기다리듯 기다려왔다. 참전용사의 미망인은 노령연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연금은 월 8만8,000원. 병원을 퇴원하면 여전히 기름값이 아깝다며 냉방에서 지낼 것이다. 기다림은 60년이면 충분하다.
안좌도(신안)=박경우 기자 gwpark@hk.co.kr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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