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황혼열차’로 스크린에 첫 등장한 이래 53년이 흘렀다. 벌써 82번째 영화다. 그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배우 중 가장 출연작이 많을 것”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안성기(58). 평범한 듯 비범한 연기로 한국 영화계를 오래도록 지켜온 큰 나무인 그가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로맨스를 펼친다. 하지만 섣불리 예단하고 실망하진 마시라. 배우자와 사별 뒤 다시 찾아온 사랑을 그린, 뻔하고 뻔한 중년의 러브스토리는 아니니까.
14일 개봉하는 ‘페어 러브’는 친구 딸을 사랑하게 된 50대 남자의 평범치 않은 사랑을 그린다. 안성기는 구형 카메라를 수리하며 수도승처럼 독신으로 지내다 여대생 남은(이하나)과 연정을 주고 받는 형만 역을 연기한다.
연기한 시간과 출연작만 따져도 이래저래 여러 장르와 인연이 깊을 만도 한데 멜로와는 거리가 멀어도 참 멀었다. 대통령의 로맨스를 담아낸 ‘피아노 치는 대통령’(2002) 정도가 그가 기억하는 멜로다운 멜로 영화다. “사랑이 소품으로 깔린 영화는 많이 찍었지만 순수하게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담은 영화는 거의 찍지 못했다”고 그는 말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열애의 감정을 스크린에서 폭발시킬 기회조차 없었다.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만을 담기엔 젊은 시절 이 땅의 사회 분위기는 엄혹하기만 했다. 그는 “80년대라는 격변의 시대 영화는 현실 참여의 역할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랑 이야기를 못했다”고 했다. 변두리 인생들의 비루한 삶에 포커스를 맞춘 ‘바람 불어 좋은 날’(1980)과 ‘꼬방 동네 사람들’(1982) 등은 사랑조차 사치로 여겼던 그의 동년배 세대의 고뇌가 담긴 산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했을 듯한, 그래서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소년처럼 헛발질하며 열병을 앓는 형만은 사랑 연기 한 번 제대로 못한 안성기의 배우 이력과 오버랩 된다.
“다행히도 어설픈 성격의 역할이라 저랑 잘 맞았던 듯해요. 다른 영화의 경우 연기에 담길 의도를 무척 많이 생각하고 나도 모르게 계산을 하게 되는데 이번엔 멍하게 찍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정말 편안하게 연기한 거죠. 표정에 너무 깊이가 있고 의도가 보이면 안 되는 영화이니까요.”
‘페어 러브’에서 남은은 곧잘 형만을 오빠라고 부른다. 형만도 “오빠가 말이야”하면서 남은을 감싸 안는다. 관객들은 안성기의 입에서 나오는 낯선 단어가 낯 간지러워 웃음을 터뜨릴 듯하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그도 “‘오빠’가 너무나 쑥스러웠다.”고 했다. “오빠라는 대사를 많이 빼고 가자고 신연식 감독에게 부탁했다. 오빠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면 얄미워 보일 듯 했다”고 그는 말했다.
영화 속에서 형만의 친구들은 “네가 이러면 안 되지”라고 충고한다. 친구 딸을 사랑하는 게 죄가 될 수도 있는 이 땅에 발을 붙인 그도 “나도 좀 말리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같이 살 날이 많지 않은 그런 사랑은 그 자체로 비극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영화 제목 ‘Fair Love’처럼 서로에게 장애를 주지 않는 공평하고 깊은 사랑이라면 둘 사이의 관계를 인정할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차기작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이란 감독이 연출하는 일본 영화로 한국에서 촬영하게 될 것”이라고만 했다. 호기심을 나타내자 “엉뚱하고 재미있는 영화”라고 말했다. 다시 멜로에 도전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엔 “시선이나 대사가 감미로운 영화는 앞으로 못할 듯 하다”고 답했다. “뭘 다루냐에 따라 마음이 달라지겠죠. 멜로의 분위기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라면 좋을 듯하네요.”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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