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희동에 있는 조각가 최우람(40)씨의 작업실 문을 여는 순간 '윙' 하는 기계음이 귀를 때렸다. 쇠를 깎는 기계 옆에는 온갖 종류의 나사와 못, 공구들이 쌓여있고, 책꽂이에는 '모터제어기술' '디지털제어시스템' 같은 기술 관련 책들이 즐비했다. 공업사를 방불케하는 이곳에서 최씨는 '어바누스' '울티마 머드폭스' '에코 나비고' 같은 희한한 이름의 기계 생명체들을 만든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씨는 "기술을 물감으로 사용하는" 작가다. 그는 만화나 SF영화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가상의 생명체들을 만들어 눈 앞에 들이민다. 그의 작품 전시장에서는 알루미늄과 스테인리스 스틸 등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작품들이 빛을 내며 유유히 움직인다. 모터와 컴퓨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지만, 그 생명체들의 발견 배경과 특징 등을 기록한 스토리보드는 관람객들을 잠시나마 헷갈리게 만든다. 상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정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낯선 대상을 맞닥뜨리는 경험은 신기함을 넘어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고 싶다. 내 작품을 보고 정말 이런 기계 생명체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며 싱긋 웃었다. "1998년 기계 생명체 작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인간이 기계에 종속돼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과 경고를 담았어요. 모양새도 훨씬 날카롭고 공격적이었죠. 그런데 작업을 할수록 자연스럽게 방향이 바뀌더군요. 이미 우리는 기술 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요. 요즘은 생활 속으로 들어온 기계문명과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최씨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과학과 예술을 접목한 그의 작업은 퍽 자연스럽다. 한국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자동차'를 개발한 할아버지, 미술을 전공한 부모를 둔 그는 로봇 설계도를 그리고 조립하는 데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 고교 시절 우연히 조각을 접하면서 과학자에서 조각가로 꿈의 방향을 틀었고, 어린 시절의 기억은 조각에 움직임을 덧붙이게 했다. 중앙대 조소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로봇제작업체에서 3년간 디자이너로 일하기도 했다.
그가 기계 생명체의 아이디어를 얻는 곳은 뜻밖에도 자연이다. 틈만 나면 자연 다큐멘터리와 생태학 관련 서적을 들여다본다. 거기서 얻은 힌트에다 상상력을 더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난해 갤러리현대의 '가상선'전에서 선보인 '우나루미노'는 갑각류 해양 생물인 따개비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딱딱한 껍데기로 몸을 싸고 있다가 물 속에서는 꽃처럼 활짝 껍질을 열고 섬모를 내보이는 모습이 군무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2008년 영국 리버풀 비엔날레에서 각광받았던 '오페르투스 루눌라 움브라'는 항구도시 리버풀의 바다와 달빛에서 영감을 받았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예정지인 옛 기무사 건물에서 열린 '신호탄'전에서 그는 기무사의 어두운 복도 천장에 향로 모양의 흔들리는 생명체들을 매달았다. 표면에 뾰족한 가시가 돋은 향로 속에는 촛불처럼 희미하게 깜빡이는 LED 조명을 설치했다. 비밀 유지를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강요했던 기무사 건물 속 응어리들이 뭉쳐 이런 생명체가 되었다는, 최씨의 상상의 산물이다.
뉴욕 첼시에 있는 두산레지던시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는 그의 앞에는 해외 전시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2월 미국 내슈빌 프리스트 아트센터 개인전, 4월 뉴욕 비트폼갤러리 개인전에 이어 내년 초에는 록펠러 재단이 운영하는 뉴욕의 아시아 소사이어티 미술관에서도 개인전이 잡혀있다. 새롭게 선보일 작품을 준비 중인 그는 "각종 문화권의 다양한 신(神)들의 모습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인류가 신에게 기댔듯 기술에 의지하게 되면서 결국 기술이 신적인 존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새로운 생명체의 출현이 임박한 모양이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