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명성의 미디어 아티스트 김수자(53)씨는 영문으로 자신의 이름을 'kimsooja'라는 한 단어로 표기한다. 성과 결혼 여부, 문화ㆍ사회적 정체성 등을 모두 떠난 '아나키스트의 이름'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뉴욕을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그의 삶과 작업은 전 세계를 떠돈다. 알록달록 원색의 이불보 보따리를 트럭 가득 싣고 떠나는 퍼포먼스를 담은 '보따리' 작업, 세계 각지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바늘 여인' 등은 현대인의 유동적 삶에 대한 연민과 성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은 뉴욕스퀘어 빌딩 전광판(2005년), 스페인 마드리드 레나소피아 미술관과 이탈리아 베니스 페니체 오페라극장(2006년), 러시아 모스크바 비엔날레, 영국 발틱 현대미술관(2009년) 등에서 쉼없이 소개됐다.
"내가 어떤 장소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장소가) 늘 나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김씨의 발길이 이번에는 스페인 화산섬인 카나리 제도와 과테말라의 화산 지역에 닿았다. 늘 자신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던 이전 작업과 달리 이번에는 오로지 자연의 모습을 찍었다. 그 결과물을 서울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고 있는 '지수화풍(地水火風): Earth, Water, Fire, Air'전에서 볼 수 있다. 2000년 로댕갤러리 전시 이후 10년 만에 열리는 김씨의 국내 개인전이다. 지난해 스페인 란자로테 비엔날레에 초청되면서 만든 비디오 작품에 과테말라 파카야 화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더한 이번 전시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연적 요소들의 연관성과 역동성을 말한다.
캄캄한 전시장에는 오직 7개의 스크린만이 보인다. 서로 바라보거나 등을 대면서 자연스럽게 조우하고 있는 이 스크린들 속에서는 5~9분짜리 영상이 펼쳐진다. 빨려들 듯 세게 몰아치는 검은 파도, 파란 하늘 속에서 다이나믹하게 움직이는 구름의 모습, 붉게 꿈틀거리는 용암의 기운에 떠밀려 서서히 떨어지는 화산재…. 카나리 제도의 해안가 절벽에서 파도가 칠 때마다 무지개가 나타났다가 바람과 함께 걷히는 장면을 담은 작품은 쉽게 발길을 떼지 못하게 할 만큼 압도적이다. 영상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이어지는 파도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차를 타고 이동하며 촬영한 산과 땅의 풍경은 낮과 오후, 그리고 흔들리는 플래시 불빛만 보이는 캄캄한 밤이라는 시간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3개의 작품으로 나뉘어진다.
김씨는 7개의 작품에 '공기의 불' '땅의 불' '물의 공기' 등 서로 순환되는 제목을 붙였다. "뜨겁게 펄펄 끓는 용암이 흘러내려 돌, 재, 공기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숨쉬고 있는 생명체를 밟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어요. 또 모든 존재가 독립적인 것 같지만 결코 독립적으로 설 수 없다는 것, 자연의 성질들이 서로 잇대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삶과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보고 있는 것 같았죠."
김씨는 자신의 작업 스타일에 대해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내 몸의 에너지 흐름에 믿고 맡긴다. 예술적 충동이 있을 때는 내가 체험하는 자연과 시간이 밀접하게 연관지어지면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 작업은 다음 작업에 대한 질문이며, 새로운 작업이 증식되고 확대되고 명료해지는 과정일 뿐 완성작은 없다"고도 했다. 그는 전시 개막 다음날인 10일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파리로 떠났다. 미국 시애틀의 빌 게이츠 재단 빌딩에 설치될 작품도 구상 중이다. 김씨의 다음 스파크가 일어나는 곳은 또 어디가 될까. 전시는 3월 28일까지. (02)544-7722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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