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0월 나는 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는데, 전주교도소는 나를 공안사범이 수용돼 있는 특별사동으로 보내지 않고 공안사범과의 접촉은 물론이고 일반재소들과의 접촉도 거의 불가능한 병동으로 보냈다. 재소자처우문제 제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뜻이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데다 나로서도 재소자처우문제에만 매달릴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재판준비나 재소자처우 개선 투쟁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그래서 전주교도소에 있는 동안에는 독서에 주력키로 했다.
그런데 이쯤에서 내가 징역을 사는 동안 있었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으면 싶다.
우선 나는 아내 조무하와 엄청나게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한 달에 4번만 편지를 쓸 수 있기 때문에 4통의 편지를 썼으나 아내는 내게 매일 편지를 썼다. 하루에 두통 쓴 날은 있어도 한통도 쓰지 않은 날은 없었다. 교도소에서 편지를 받는 즐거움은 대단히 큰데 나는 거의 매일 편지를 받았고, 연휴가 있을 때는 하루에 너댓통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봉함엽서 한 장에 원고지 약 100매 분량의 편지를 쓰곤 했는데, 130매 분량을 쓴 일도 있다. 1987년도에는 이 편지들을 묶어 '새벽노래'라는 이름의 책을 냈는데, 전청연(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 같은 데서는 이 책을 청년학교 교재로 썼다고 했다.
우리가 이처럼 편지를 많이 주고받은 건 할 말이 많아서라기보다 부부의 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였다. 도둑장가 가듯 아무도 모르게 다방에서 결혼식을 올리고서 잠깐 함께 살다 곧바로 구속되어 3년간이나 징역을 살게 되었으니 부부의 정을 나눌 겨를이 없었던 터라 편지로 부부의 정을 나누면서 키워갔던 것이다.
마침 그 때 쓴 편지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데,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칭송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칭송은 내게 헛것이며, 세상 사람이 다 당신에게 위로의 말을 할지라도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의 말 한 마디에 어떻게 비길 수 있겠소'라고.
그리고 우리 부부는 독재권력이 우리를 갈라놓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하나됨이 중단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자세로 어떤 상황에서도 부부의 하나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의 하나로 우리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매일 밤 10시 나는 교도소에서, 아내는 집에서 같은 성경구절을 읽었다.
마태복음 제1장부터 매일 한 장씩 얽었는데, 특히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의 말씀, 곧 예수가 죽음에 임박해서 제자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의 말을 하고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류 구원에 대한 예수의 염원이 너무나도 강렬한 데 감동하여 소리 내어 운 일도 있다.
그리고 나는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바깥소식을 상당히 알고 있었는데, 사방담당이었던 이모 담당과 조모 담당이 나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에게 바깥소식을 전해주기도 했지만 사회문제에 대한 내 견해를 듣고 싶어도 했다. 심지어 내 해석을 들어봐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듯이 생각하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무엇을 예측하면 꼭 그대로 될 줄로 생각해서, 내가 박 정권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 그 말을 상당히 믿기도 했다. 이모 담당은 내가 출소한 후 자녀들과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올 정도로 친하게 지냈는데, 그 후 내가 온갖 풍상을 겪는 통해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런데 1979년 10월 말, 그러니까 정확히 10월 26일, 그날도 나는 평소처럼 5시 반에 일어나 아침운동과 명상, 그리고 아침식사를 하고서 책을 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담당들이 교대를 한다고 부산할 텐데 그날은 어쩐지 조용했다.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야유회를 간다는 말도 있었기에 그 때문인가 싶었다. 그런 가운데 당일 근무자가 보통 때보다 좀 늦게 와서, 인사차 왜 늦었느냐고 물었는데 아무 말이 없었다. 야유회 가지 않느냐고 물어도 안 간다고만 대답할 뿐 왜 안 가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던 차에 창문 밖을 내다보니 교도소청사 지붕 위의 국기가 반기로 게양돼 있었다. 직감적으로 대통령이 죽었구나 싶었다. 곧바로 '박정희 죽었지' 하고 소리치듯 물었는데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것은 곧 박정희가 죽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곧바로 '누가 죽였어요' 하고 물었다.
박정희가 죽었다면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대통령 유고는 사실이지만 그밖에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박정희를 죽였는지만 말해보라고 다그쳤다. 그랬더니 중앙정보부장이라고 말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다면 그것이 미국의 사주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것인지가 중요했지만 그것을 알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내가 박정희대통령의 죽음을 직감적으로 알아낸 데 대해 담당들이 감탄했다.
어쨌든 영구집권을 획책하여 민주화를 거부하던 독재자가 죽은 것은 일단 민주화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민중봉기에 의해 독재자가 축출된 게 아니고 권력내부의 자중지란에 의해 죽은 것은 앞으로 권력을 쥔 사람의 대응에 따라 정국의 향방이 결정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가 체포되고 박정희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진다고 했다.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가 체포되고 박정희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진다는 것은 민주화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0.26사건이 있은 후 곧바로 시국사범에 대한 석방조치가 있었다. 다만 일괄 석방되지 않고 단계적으로 석방되었는데, 이 또한 민주화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10.26사건이 있고서 두 달이 지난 12월 30일 시국사범으로선 가장 늦게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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