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에서 일출을 보고 섬진강 따라 아침 먹으러 간다. 지난해 가을 하동 악양에 만들어진 박경리 소설의 '토지 길'을 걷다가 인연이 된 밥집으로 간다. 푸른 섬진강과 하얀 모래밭을 마당으로 펼쳐놓고 사는 노부부의 밥집에서는 닭국을 끓여준다. 토종닭을 잘게 토막 내고 무를 빚어 넣어 맑게 끓인 그 국을 내 할머니는 '백국'이라 불렀다.
닭 한 마리로 한 가마솥씩이나 끓여내는 닭국이 무슨 대단한 음식이었을까마는, 백국을 끓이는 날 할머니는 이웃에 사는 친척은 물론 동네어른까지 아침식사에 모셨다. 나는 초대의 임무를 맡은 '어린 전령'이었다. "우리 집에 진지 드시러 오시라던데요." 이 집 저 집 숨이 차도록 뛰어다니며 나는 잔칫날처럼 신이 났었다. 고깃점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무만 수북하게 든 백국을 받고 두레밥상에 박꽃처럼 환하게 피던 인정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슬쩍, 내 백국에 살점을 넣어주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산행 전 그 밥집에 미리 백국을 시켜놓았다. 해가 바뀌었으니 닭국물로 떡국을 끓여달라고 했다. 좋은 아침에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백국을 함께 먹는다. 그릇마다 고기가 수북하게 들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또 한 살을 먹는다. 저 세상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떡국을 드셨을까. 더운 백국에 담긴 쇠숟가락보다 내 눈시울이 먼저 뜨거워진다.
시인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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