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 강릉 출신의 스무 살 여대생은 난생 처음 '지하철 1호선'이라는 뮤지컬을 본 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소망을 털어놓지 못한 채 재즈댄스를 배우고 오디션을 전전했지만,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가까스로 선 무대가 2006년 공연한 '드라큘라'. 그는 배역 이름도 없는 앙상블로 출연했다.
지금은 신데렐라로 불리는 배우 임혜영(28)씨 이야기다. 그는 지난해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페기 소여,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 등 주역을 잇달아 맡으며 없어서는 안될 뮤지컬 배우로 급부상했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년 전.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인공 엘리자 두리틀 역을 뽑는 TV오디션에서 1,18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 과정도 험난했다. 3개월 동안 진행된 오디션 초반에 그는 성악을 전공(숙명여대 성악과)했음에도 한 심사위원에게서 "당신의 노랫소리는 듣기 싫다"는 핀잔을 받았다. 임씨는 "노래만 믿고 뮤지컬에 뛰어들었는데, 상처가 컸다. 매주 열린 오디션에서 단점을 지적받다 보니 자신감도 잃고 포기하고만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때로부터 2년이 흘렀는데도 이 말을 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임씨는 이때를 배우로서 가장 힘들었지만 동시에 '약이 된 시기'로 꼽았다. 그 후 뮤지컬 배우라면 누구나 탐내는 배역을 차례로 꿰찼기 때문이다. 그는 "뮤지컬 노래를 더 열심히 연구했다"면서 "감히 성악과 비교한다면, 좀 더 피부에 와 닿게 불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유희성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은 지금 임씨의 노래를 두고 "극성을 잘 반영해 정서 표현이 탁월하다"면서 "성악과 내추럴 보이스가 둘 다 가능한 드문 배우"라고 호평한다.
반면 연기는 그에게 오히려 편하게 다가왔다. "노래는 배웠기 때문에 틀에 갇히기도 하고 자유롭지 못하지만 연기는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임씨의 말. 특히 '마이 페어 레이디'와 '지킬 앤 하이드' 연출자였던 데이빗 스완의 지도 덕분에 과장된 연기를 버릴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어를 잘 모르는 그가 제 눈을 보고 '혜영이 너 그 마음 아닌데 왜 그렇게 연기하니'라고 말할 땐 뜨끔했어요. 진실된 연기를 위해 마음에 다양한 감정을 채워가는 중이에요."
올해 그는 세계 4대 뮤지컬의 하나로 꼽히는 '미스 사이공'에서 주인공 킴 역을 맡아 관객을 울린다. 킴은 베트남전 중 미군 크리스와 비운의 사랑을 나누는 베트남 처녀. 지금껏 임씨가 주로 연기해온 밝고 천진한 배역과는 사뭇 다른 인물이다. 이미지 변신에 걱정은 없는지 묻자 그는 "실제 내 모습과 가장 가깝다"며 자신감을 표했다. "나는 슬픔과 아픔을 혼자 삭이는 편이다. 나만의 시간이 없으면 견디지 못한다"고도 덧붙였다.
'미스 사이공'이 끝나면 그는 창작 뮤지컬 초연에 출연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아무래도 인물의 성격이 규격화돼 있어요. 이제는 저만의 자유로운 연기를 펼치고 싶어요." '미스 사이공'은 3월 13일~4월 4일 고양 아람누리 아람극장, 4월 16일~5월 1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5월 14일~9월 12일 서울 충무아트홀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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