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 프라이스 등 지음ㆍ배도희 옮김/ 북하우스 발행ㆍ284쪽ㆍ1만2,000원
2006년 2월 뇌과학 분야의 학술지 뉴로케이스에 '비상한 자서전적 기억의 사례'라는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은 'AJ'라는 한 미국 여성의 독특한 기억력을 소개했다. 체스 경기 몇십 판을 그대로 복기하거나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우는 능력을 지닌 인물들은 가끔 알려졌지만 AJ의 기억력은 유별났다.
당시 41세였던 이 여성은 14세 이후의 하루하루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특정한 날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주요 뉴스는 무엇이었는지 등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냈다.
논문에서 AJ로 지칭됐던 이 여성 질 프라이스(45ㆍ사진)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에서 놀라운 기억력이 지배해온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든>
비범한 기억력은 그를 '인간달력'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가령 1978년 9월 25일이라는 날짜를 제시하면 프라이스는 "그날은 월요일이었고 내가 막 8학년에 올라갔다.
샌디에이고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가 있었던 날"이라고 말하고, 1991년 1월 16일을 제시하면 "그날은 수요일이고 걸프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이다.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모두 평상시처럼 살고 있는지 의아해한 날"이라고 떠올린 뒤 "챌린저호가 폭발한 1986년 1월 28일 화요일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 기억한다.
평범한 사람이 3주 뒤 뚜렷이 기억할 수 있는 일상사의 사건은 1건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30년이 넘는 긴 세월의 하루하루를 소소하고 세밀하게 기억할 수 있는 프라이스의 능력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비상한 능력을 "축복이자 저주"라는 말로 요약했다. 지치고 힘들 때 행복한 순간의 기억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는 그의 능력이 한없이 부러울 수도 있지만, 순탄치 못했던 그의 삶은 역설적으로 망각의 긍정적 의미를 곱씹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춘기 무렵에 어릴 적의 아픈 기억을 추려내는 기억 선별 과정을 통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아를 형성한다고 한다.
그러나 긴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가치판단이 배제된 채 그저 '기억에 불과한 기억'을 제 속에 쌓아두며 긍정적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저자는 성인이 된 후에도 쉽게 절망감에 빠졌다고 털어놓는다.
프라이스는 지금 한 대학의 행정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평생을 기억의 집 속에서 갇혀 살아가고 있는 한 인간의 수기는 "기억과 망각이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제시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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