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태준의 문향] <17> 김시습의 시 '무제삼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태준의 문향] <17> 김시습의 시 '무제삼수'

입력
2010.01.11 01:12
0 0

"온 종일 짚신으로 되는 대로 거니나니/ 한 산을 걸어 다하면 또 한 산이 푸르네// 마음에 생각 없거니 어찌 몸에 불리우며/ 도(道)는 본래 이름 없거니 어찌 거짓 이뤄지리// 밤이슬은 마르지 않았는데 산새는 울고/ 봄바람이 끝이 없으매 들꽃이 아름답다// 짧은 지팡이로 돌아오매 봉우리마다 고요한데/ 푸른 절벽에 어지러운 놀이 볕에서 난다." (김시습, <무제 삼수> 시의 첫 수, 김달진 번역)

조선 초기의 대표적 방외인(方外人)으로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ㆍ1435~93)은 허균(許筠)이 "진여(眞如)를 깨달은 경지"라고 평했다는 이 시를 읊으며 방랑길에 올랐다.

수양대군[世祖]이 조카 단종(端宗)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에 삼각산 절방에서 과거 공부하던 책을 불사르고 뛰쳐나와,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鷺粱津)에 묻은 일이 유랑 길로 이어졌다.

21살에 떠돌기 시작하여 호남을 거쳐 경주 금오산실(金鰲山室)에 한 동안 정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29살. 여기서 지은 <금오신화(金鰲新話)> 5편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절대 고독한 인물상으로 방랑자의 고독한 내면을 반영한다. 그러나 방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평생을 계속했다.

강릉과 양양에 머물던 51살 어름에 쓴 <동봉육가(東峯六歌)> 에서는 첫 구절부터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 이름은 동봉"이라고 했고, 둘째 수에서는 아예 "지팡이여 지팡이여"라고 했다. 직률나무 지팡이야말로 반생의 반려이자 표상이었다. 그의 발자국은 부여 무량사에 묻힌다.

그는 평생을 산에 의지했다. 그의 호인 동봉(東峰)에는 수락산이, 설잠(雪岑)에는 겨울 산이 있다. 그에게 있어 겨울 산은 한계산(寒溪山)과 설악산으로, 특히 설악에 남긴 고독과 절의의 자취는 오세암을 영원한 그의 유허(遺墟)로 전하고, 지금도 안동 김씨의 후대가 지키고 있을 영시암(永矢菴)은 오세암에서 지척이다.

삼연(三淵) 김창흡이 즐겨 머물렀던 가평의 벽계(碧溪)에서 북한강을 따라 청평산과 춘천을 거쳐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매월당의 자취가 짙게 서린 곳이다.

"금강산은 수려하기는 하나 웅장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웅장하기는 하나 수려하지 못하다. 이에 비하여 설악산은 수려한데다 또한 웅장하다." 이것이 매월당의 평이라 전하는데, 과연 원통의 백담사 계곡으로 오르는 1,700여 미터의 내설악은 36번이나 내를 건너 대청봉에 이르고, 다시 비선대로 내려가는 천불동 계곡은 금강산의 만물상과 비겨 손색이 없는 장관이다. 내외 금강을 다 오르고 설악을 새로 넘은 사람이면 수긍하고도 남을 평가이다.

김시습의 전기를 쓴 율곡 이이(李珥)가 매월당의 삶을 평하여 '선비의 마음에 스님의 발자취[心儒迹佛]'라고 한 이 한마디에 그의 삶의 고뇌와 평생의 방황은 물론 사상의 너비까지 잘 갈무리되어 있다. 눈 쌓인 사육신묘에 다시 서니, 50년을 그 언저리에 산 인연이 오늘 더욱 다사롭다.

동국대 명예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