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없이 해 온 마술인데, 하필 개교식날 왜 이렇게 손이 떨리죠?"
80여명의 교육생들 앞에서'마술학교 교장' 백호민(42)씨의 손이 긴장한 탓인지 연신 파르르 떨렸다. 특수 제작된 마술용 지폐를 잡은 손이 자꾸 머뭇머뭇 하더니, 아차 하는 사이 결국 지폐를 잘못 펼쳤다. 만원짜리 지폐가 점점 커지는 마술이었는데, 숨겨뒀던 큰 지폐가 살짝 보이고 만 것이다.
시끌벅적 요란한 정선 5일장 100여명의 관객 앞에서 마술을 할 때도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던 그였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그에겐 꼬박 3년을 꿈에 그리며 기다려왔던 날이었다.
산골 마을에 마술학교 깜짝 등장
9일 강원 정선군 북평면 장열리. 6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조용한 산골마을이 전에 없이 들썩였다.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숙박시설 '365 행복마을'에 마술학교 '매직 빌리지'가 문을 연 것이다. 2008년부터 운영된 '행복마을'은 그동안 손님이 없어 찬 바람만 가득했다. 주말에도 기껏해야 숙박객은 한 두 가족밖에 없었다.
산골 외진 마을에 난데 없이 마술학교가 개교한다는 소식에 아침부터 외지 손님들의 차량이 줄을 이었다. 주민들도 신이 났는지, 장열리 부녀회원들은 영하 9도의 추운 날씨에도 '행복마을' 부엌으로 모여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마술을 배우려는 외지인 80여명이 모인 가운데 개교식 행사가 열렸고 전문 마술사들의 화려한 마술 공연도 이어졌다. 최현우(24)씨가 카드로 꽃을 피우는 듯한 '카드 마술'을 선보였고, 박근영(36)씨는 길이가 다른 세 개의 줄로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3중 루프 마술'로 교육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초등학생부터 은퇴교사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은 신기한 듯 탄성을 쏟았다.
뒤이어 무대에 선 마술사는 이 학교 교장인 백호민씨. 명색이 교장이 마술 시범을 보이다 실수를 하자 교육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북적대는 외지 손님들만으로 그에겐 그저 감격스러운 하루였다.
마술에 빠져든 공무원
행사가 끝난 뒤 "방송에 출연해서도 안 떨렸는데…"라며 못내 아쉬워하던 백씨는 그래도 입가엔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3년을 고민해왔던 일이 이제 시작된 거에요. 강원도 오시는 분들이 앞으로 꼭 정선을 거쳐가는 날이 올 겁니다."
3년의 준비 끝에 마술학교를 개교한 백씨는 정선군청 산업경제과에 근무하는 지역 공무원이다. 정선 토박이 공무원인 그가 마술학교를 열게 된 것은 다름아니라 이곳 주민들을 위해서였다. 그가 마술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7년. 정선군 미래기획단에서 근무할 당시 관광객 유치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마술 축제'를 제안한 것.
하지만 마술 문외한이던 그로서는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인천 부평의 마술학원에 등록했다. 매주 금요일이면 정선에서 4시간 반을 차로 달려 학원을 다니면서 마술에 푹 빠졌던 그는 9개월 뒤에는 정선 5일장터나 지역문화제 등에서 직접 마술을 선보였다.
마술축제는 시설 미비 등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그는 꿈을 접지 않았다. 국내 교육마술 대가인 박근영씨를 전국 공연장을 찾아 다니며 삼고 초려한 끝에 강사로 섭외하는 데 성공, 아예 학교를 개교하게 된 것이다.
박씨는 "잘 모르는 공무원이 찾아와 산골에서 마술학교를 함께 하자고 해 황당했는데, 백씨의 열성이 구체화하는 것을 보고 마술 대중화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마술 교육은 당일 또는 1박2일, 2박3일 코스 3가지로 나눠 진행되는데 교육비는 5만~20만원. 이중 숙박료와 식사비 등은 고스란히 마을 주민들에게 돌아가고, 수업료는 교육마술 전문강사들의 인건비로 사용된다.
이날 첫 입교생은 모두 87명. 정선군 아우라지 아동복지센터의 학생 55명을 비롯해 퇴직 교사, 학원강사, 관광호텔 직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마술을 배우려는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강릉에서 왔다는 간호학원 강사 김미선(42)씨는 "요즘은 강의할 때 수강생들이 지루하지 않게 해야 인기가 있다"며 "마술을 곁들이면 재미난 수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오게 됐다"고 말했다.
두 딸과 함께 원주에서 2시간을 달려온 안중현(45)씨는 "아이들이 너무 재미있어 하는데, 오히려 내가 마술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운영하고 있는 커피 전문점에서 손님들에게 마술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의 기대도 크다. 장열리 이장 이상국(61)씨는"한산하던 마을에 손님들이 북적대니까 힘이 솟는다"며 "앞으로 봄이 되면 아이들에게 산딸기도 따먹게 하고 쥐불놀이도 가르쳐 줄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백호민씨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지만, 마술이 앞으로 정선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이 되도록 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선=김혜영 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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