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묵직한 책자가 집으로 배달됐다. 세계 1위 화장품기업 로레알그룹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미(美), 100,000년의 역사> 였다. 프랑스의 유력 출판사 갈리마르가 출간한 책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을 넘나들며 미의 역사와 효용을 추적한다는 야심찬 기획만큼이나 방대한 분량이었고 디자인이나 내용에서 공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미(美),>
전 5권, 1,300페이지 모두 컬러로 제작됐고 미에 대한 숭배를 시각화한 듯 피라미드 신전 형태를 띤 책 디자인은 호사스러웠다. 프랑스의 유명 철학자 미셰 세르를 비롯, 고고학자 철학자 비평가 민속학자 예술가 큐레이터 등 집필에 참가한 전문가 집단만 세계 35개국 출신, 300여명에 달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글로벌 화장품기업으로서 적어도 미에 관한 한 단지 기술개발만이 아닌 인문사회학적인 진보에 있어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정작 아쉬웠던 것은 35개국 출신의 집필자들이 참여한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한국은 집필자는 물론 내용에서도 참여는 물론 언급도 없다는 사실이다.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의 경우 헤이안부터 에도시대까지 우키요, 이키, 와비 등 일본인의 미의식을 탐구한 10개의 글이 실렸고 중국도 명청시대의 머리장식부터 향수, 꽃문양 등 9개의 글을 올렸다. 한국은 로레알그룹이 정한 10대 전략국가 중 하나이지만 시장일뿐 미를 논할 대상은 아니었나 보다. 로레알코리아 직원은 "출판작업이 본사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라 우리도 무척 안타깝다. 한국이 시장으로서는 엄청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로레알이 한국시장에 지사를 설립한 것이 1993년, 햇수로 17년째이니 반만년 한국 역사와 문화를 모르지 않으련만 본사 탓만 한다고 발끈하기 어려운 것이 이 역작에서 한국이 빠진 것이야 말로 한국의 문화수준, 그리고 이를 보는 외국의 시선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해외여행 중 행색이 훌륭하면 재패니즈, 남루하면 치노라고 불리는 것은 다반사, 삼성 LG는 알아도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해 아는 외국인들은 드물다.
올해는 G20 정상회의가 우리나라에서 열린다. 새해 벽두부터 국격을 높이자는 소리가 높은 이유다. 정작 국격에 앞서, 해외에서 온 귀빈들에게 우리 문화의 역동성과 매력, 한국인의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기회로 삼는 건 어떨까 싶다. 패션과 화장이 겉치레로 평가절하되던 시대도 있었지만 21세기 패션과 뷰티는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촉망 받고 있다. 한국의 미적 자산을 축적하기 위해 로레알 같은 야심만만한 지원사업에 나서는 관련 기업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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