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感恩寺)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터만 잘 정비되어 있다. 그리고 3층 석탑 2기(국보 제 112호)와 특이한 구조의 법당 건물터(사적 제 31호)가 남아 있어 이 곳을 찾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감은사는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 문무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사찰이다.
동해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고자 죽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은 나라에 대한 충을 의미하며 그 아들인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을 이어받아 완성했다. 즉 아버지의 나라를 위한 충과 아버지의 유언을 실행한 아들의 효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은사는 충효의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행정위치는 경주시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의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해에서 신라도성에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대종천(大鐘川)이 바다로 흘러 드는 위치에 해당된다. 이 대종천과 동해가 만나는 곳을 신라에서는 동해의 입이라는 뜻의 동해구(東海口)라 했다.
지난 해는 감은사 터 최초 발굴 50주년이면서 서3층석탑 해체 시 사리장엄구일체가 발견된 5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인 1959년으로 돌아가 보자. 그 해 추석에는 태풍 사라호가 영남지방을 강타하면서 우리나라 기상관측이 1904년 시작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태풍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감은사 터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을이 생겨 2탑을 제외하고 절터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옛 기록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감은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한 뒤 동해 바다에 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해 용이 된 문무왕의 넋이 감은사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법당에 공간을 마련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국립박물관에서 감은사의 실체를 밝히고 아울러 곧 넘어질 것 같은 상태의 서쪽 3층석탑에 대한 해체복원공사 계획을 마련했다.
감은사의 건물 흔적을 찾기 위해 태풍 사라호가 휩쓸고 간 후 경주에서 용당리에 이르는 비포장 길은 파손되고 복구되지 않아 포항을 둘러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서 현장에 접근할 정도로 도로 사정이 열악했다. 발굴 조사는 민가를 옮길 수 없어 민가의 부엌바닥 공간까지 파내는 작업까지 해 일부 흔적을 찾기도 했다.
서탑 해체 작업은 그 해 크리스마스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12월31일 제일 위층인 3층 옥개석을 들어내자 3층 몸돌에 마련되어 있는 사리공 속에서 온전하게 남아있는 사리장엄구 일체를 발견했다. 말하자면 통일신라시대인 682년 건립된 석탑에서 최초로 사리장엄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의 석탑은 사리유물을 도굴하기 위해 대부분 파괴되었는데 감은사 탑은 온전히 남아 광복 후 학술 조사를 통한 해체복원이 이루어진 최초의 탑으로 기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높이 약 14.5m에 이르는 신라 최대의 석탑이다. 발굴된 사리장엄유물은 일괄해서 보물 제 36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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