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 <아이리스> 는 설정이 다소 황당했지만 매력적인 배우들의 연기,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와 영상만으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핵 테러를 클라이맥스로 장식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세밑에 아랍에미리트(UAE)행 비행기에 오르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비즈니스 한국호의 CEO 대통령, 더 이상 잘 들어맞는 이미지가 있을까. 곧 바로 400억 달러짜리 원전 수주라는 낭보가 이어졌고, MB시대의 상징 '경제대통령'상에 멋진 조명이 들어왔다. 아이리스>
신뢰성이 원전 수출의 토대
'원자력'이란 말은'핵'보다 사뭇 긍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핵물리학이나 핵의학이란 중립적 용례도 있지만, 원자력은 평화적 이용의 맥락에서 범용되는 반면 핵은 통상 폭탄과 전쟁, 방사능오염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쓰인다. 그러다 보니 같은 대상에 어떤 용어를 쓰는지를 보면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원자력보다 핵 표현을 선호한 사람들은 원전 플랜트 수주에 적잖이 당혹해 했을 것 같다. 원전은 위험과 환경오염의 원흉이고, 에너지 효율성이란 것도 방사성폐기물 처리나 원전 폐쇄 비용까지 고려하면 빛 좋은 개살구라고 믿어 왔다. 콧대 높은 프랑스를 꺾고 달성한 이번 원전 수주를 역사적 쾌거라고 논평한 언론에 덩달아 박수를 칠 수 없었던 이유다. 원전에 안주하다 저탄소사회를 향한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이번 계약을 400억 달러짜리라고 하지만 확정된 것은 원전 설계와 건설 계약금 200억 달러뿐이며, 경제적·군사적 협력이 포함된 무리한 패키지 딜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심지어 두바이 모라토리움의 백기사역을 맡은 UAE조차 불안해 질 것이라는 우려도 그 같은 시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UAE 원전 수주를 폄하하는 것은 그리 온당한 태도는 아니다. 지나치게 열광해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것도 문제지만, 원전 시장의 메이저인 프랑스와 경합해 이긴 일을 두고 이리저리 시비만 거는 것은 옳지 않다. 박수칠 것은 박수를 쳐야 한다. 우리가 사르코지 대통령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가격 경쟁력, 가격 대비 성능, 상대적으로 낮은 고장율, 짧은 공사기간 등 비교우위 때문이다. 또 수주 전쟁을 흔히 좌우하는 정치 리더십의 역할이 주효했다.
이제는 우리가 수출하는 원전의 안전성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안전성은 수출 원전의 신뢰성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지만, 그 승부처는 오히려 국내에 있다. 에너지의 큰 부분을 원전에 의존하는 처지에서 국내 원전의 안전성 문제가 불거지면 대외적 신뢰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이번 UAE 원전 수주의 성패는 원자력 안전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편치만은 않다는 점이다. 누출 사고는 물론 단순한 가동중지만으로도 신뢰가 손상될 수 있다. 한국의 세계 원전시장 진출에 위협을 느낄 경쟁국들이 야수처럼 달려들어 후벼 팔 것이다. <아이리스> 식 음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원전 테러 기도나 관리부실 사고 등 끔찍한 시나리오도 마냥 배제할 일은 아니다. 아이리스>
안전 관리체제에 빈틈없도록
원자력 안전기술이 진보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기술이 관건이다. 극미한 확률이라도 안전사고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더욱 어려운 문제는 인간적 오류(human failure)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박을 터뜨렸다고 축배를 올리고 대대적인 포상으로 기세를 올리거나, 연구개발과 규제 권한 등을 놓고 옥신각신할 때가 아니다. 냉철하게 우리의 원전 안전기술을 평가하고 안전관리체제에 허점은 없는지 점검하여 빈틈없이 보완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새해 정부가 가장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과제로 원자력 안전을 주문하고 싶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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